Ⅰ. 書論

Ⅱ. 本論
 Ⅱ-1. 가톨릭교회의 발전
 Ⅱ-2. 로마 교회와 프랑크 왕국(Frankenreich, 481~843)의 제휴
 Ⅱ-3. 교권과 세속권의 대립
 Ⅱ-4. 서임권 투쟁과 카노사의 굴욕(Humiliation at Canossa)
 Ⅱ-5. 교황권의 몰락

Ⅲ. 結論



김 솔

 


Ⅰ. 서론


서양 중세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봉건제도(封建制度, feudalism)와 가톨릭교회[각주:1]를 연구한다. 하지만 이 둘은 완전히 분리되어 물질세계와 관념세계 각각을 관장하지는 않는다. 서로 상호 연관성을 가지면서 중세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고대 로마 제국이 분열, 해체되면서 통일적인 지중해 세계가 붕괴되어 무질서와 혼란의 상태가 계속된 유럽 사회는 새로운 변혁을 모색해야만 했었다. 이에 따라 유럽에서는 정부의 기능, 군사적 책임, 토지 소유를 조합시킨 보편적인 제도로 봉건제도가 등장하게 되었다. 한편 봉건제도와 함께 중세사회를 정신적으로 지배한 것은 가톨릭교회였다. 가톨릭교회의 우두머리는 교황으로 그 지위는 고대 제국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타격을 받지 않고, 오히려 로마적 전통의 계승자로서 위세가 한층 높아졌다. 이러한 가톨릭교회의 발전에 중대한 계기가 된 것은 프랑크 왕국과의 제휴였다. 프랑크 왕국의 역대 왕들은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교회 발전에 노력하였다. 그 후 가톨릭교회는 이교도의 개종, 이단의 극복, 교회 조직의 정비 등에 주력하였고, 역대 교황들이 이러한 교회의 쇄신에 진력한 결과, 유럽 전역은 가톨릭교화 되었다. 기독교는 중세인의 생활양식은 물론이고 철학, 문학과 예술 등 광범위한 분야에 그 영향력을 행사했다. 따라서 중세 문화는 기독교의 교리와 가치관에 지배된 문화였다.

본고에서는 이 중 중세 유럽인들의 정신과 사상을 지배하며 그들의 생활과 밀접한 연관을 맺었던 중세 가톨릭교회의 발전과 변화를 살펴봄으로써 중세 유럽인들의 모습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Ⅱ. 본론


가톨릭교회는 서양 중세를 통하여 교리와 신학, 조직과 예배 의식을 확립하였고, 봉건제도하의 정치 및 경제 분야에 있어서도 세속적 권위를 장악하였다. 물론 이러한 세속적 권위의 장악에는 세속 군주에 대한 황제 지위의 인정과 대관을 통해 군주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은 것도 있었다. 비대해진 교권과 세속권의 대립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궁극적으로는 교황의 세력이 세속군주의 세력에 대해 우월성을 갖게 되었으며, 전 유럽은 십자군 운동과 같은 기독교의 명분에 복종하게 된다.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은 사회 이론과 세계관의 확립에도 작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세인의 경제 활동과 사회 신분의 유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중세의 학문과 교육은 성직자들의 수중에 장악되어 그 방향과 내용이 결정되었다. 또한 문학과 예술은 기독교의 이념에 맞는 내용과 주제를 채택하였으며, 모든 지적 활동은 신학적 기초가 된 스콜라 철학의 영향 하에 놓이게 된다. 중세 말 가치관의 변화와 정치ㆍ경제ㆍ사회 등 다방면에 걸친 변화가 가톨릭교회의 존립 기반을 뒤흔들어 놓을 때까지 가톨릭교회의 보편적인 권위는 세속적 질서에 있어서나 도덕적 질서에 있어 확고부동하였다.



Ⅱ-1. 가톨릭교회의 발전


기독교의 성립 초기에는 제도화된 조직도 뚜렷한 교리도 정립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신도의 수가 크게 증가하고 교세가 확장되자 5세기 중엽부터 로마 제국의 통치 조직을 모방한 교회제도가 발달하게 되었다.

로마 시대에는 로마, 콘스탄티노플, 안티오크,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에 5대 관구가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유력한 것은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교회였다. 특히 로마 교회는 12사도 중 최연장자이며 지도자였던 베드로가 창건한 교회로 전체 교회의 중심세력이 되었다. 이것은 당시 로마가 정치와 행정의 중심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로마에서 다수의 순교자가 나와 기독교가 크게 전파되었다는 신앙적 근거가 로마를 기독교의 중심이 되게 하였다. 이것이 로마가 교황청이 된 주된 이유였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로마와 그 부근의 정치는 자연히 로마 교회의 영향 하에 이민족의 침입으로 생긴 혼란기의 치안 유지에 이바지하여 민중의 신망을 받았다. 로마 교회는 다시 게르만 민족의 개종에 착수하여 프랑크 왕국과 제휴하여 서유럽 일대에 기독교를 전파하고, 프랑크의 원조에 의하여 교황령을 설치하여 세력을 더욱 강화하였다. 그리하여 로마의 주교를 교황이라 불렀으며, 교황이 서방 기독교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Ⅱ-2. 로마 교회와 프랑크 왕국(Frankenreich, 481~843)의 제휴


동로마의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각주:2]가 이탈리아와 아프리카의 동고트족(Ostrogoths)과 반달족(Vandals)을 격멸하고, 아랍인이 에스파냐의 서고트(Visigoth Kingdom) 왕국을 제거하자, 갈리아의 프랑크족 지배자들은 서유럽에서 살아남은 중요한 게르만 세력이 되었다.

프랑크 왕국의 건설자는 클로비스(Clovis)[각주:3]였다. 그는 500년경에 오늘날의 프랑스와 벨기에 지역을 대부분 정복하고, 당시 그 지역의 주교 및 주민들이 믿고 있던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각주:4] 클로비스는 메로빙거 왕조[각주:5]를 창시했다.

그러나 클로비스는 통합된 영토를 적장자에게 상속하지 않고, 게르만족 상속방식에 따라 아들들에게 왕국을 분할 상속 하였다. 그 후 200년간 그의 자손들은 계속된 세력 다툼을 벌이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카들을 제거하고 단독 정권을 수립하는데 성공한 클로타르 2세(ChlotharⅡ)는 정권 수립 과정에서 도움을 받은 게르만 부족장에게 특권을 부여한다. 클로타르의 칙령(Edictum Chlothar)이 그것이다. 그 결과 봉건 제후들의 권한이 매우 강해지게 되었다.[각주:6] 급기야 세 명의 궁재(宮宰, majordomus) 중 아우스트라시아(Austrasia)[각주:7]의 궁재직을 대대로 세습한 카롤링거가(家)가 네우스트리아(Neustria)[각주:8]-부르군트(Burgund) 궁재 연합군을 Tentry전투(687)에서 제압하고 홀로 궁재의 자리에 남는다.[각주:9] 이후 751년 카롤링거가문의 피핀(PippinⅢ, 751-768)은 쿠데타를 단행하여 메로빙거가 최후의 왕 힐데리히(ChilderichⅢ)를 왕위에서 축출하고 왕이 되었다. 이로써 피핀은 새로운 왕조인 카롤링거왕조(Carolingian dynasty)[각주:10]를 창설하게 되었다.

피핀이 이 새로운 왕조를 창설하는 데에는 교황이 결정적으로 기여를 하였다.[각주:11] 쿠데타를 단행하기에 앞서 피핀은 교황 자카리아스(Zacharias, 741-752)의 지원을 요청하였고, 교황은 이 요청을 수락하였다. 이로 인해 로마교회와 프랑크왕국이 긴밀하게 제휴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마련되었다.

교황의 승인에 힘입어 751년 피핀은 프랑크인들의 관습에 따라 왕으로 선출되었다.

피핀의 왕위즉위를 계기로 크게 발전된 교황권과 프랑크 왕국의 우호적 관계는 교황 스테파누스2세(StephanusⅡ, 752-757)가 그의 전임자인 자카리아스를 계승한 이후 더욱 진전되었다. 롬바르드(Lombard)인들의 침입에 직면하여 한편으로는 롬바르드왕과 협상을 시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비잔틴 제국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등[각주:12] 여러 가지 외교적 노력을 동원했으나 다른 대안이 없자 스테파누스는 피핀에게 도움을 호소하기로 작정한다. 피핀은 이 요청에 응하는데, 그 이유는 그의 왕권이 교황에게 호소함으로써 확보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교황권이 롬바르드인들의 지배하에 들어가면 그의 왕권은 크게 손상될 것이며 반대로 그가 교황권을 효과적으로 보호하고 롬바르드인들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면 그의 유약한 왕권은 크게 고양될 것이었다. 이후 754년과 756년, 두 차례에 걸쳐 피핀은 이탈리아로 원정하였고, 롬바르디아족의 정복지를 교황령으로 로마 교황에게 주었다. 이에 로마 교황은 로마인들의 보호자(Patricius Romanorum)의 칭호를 부여함과 동시에 프랑크인들에게 피핀가문 이외의 다른 어느 가문출신의 왕도 선택하지 못하게 하였다. 도유식(塗油式)[각주:13]과 더불어 피핀의 왕위를 강화시켜주는 이러한 조치는 피핀이 간절히 원하는 바였다.

이후 신성한 기독교 왕의 지배하에 있는 프랑크 왕국 내에서 정치와 종교 간의 긴밀한 연계가 이루어졌다. 메로빙거 시대에 종교회의는 왕의 권위와는 별개로 개최되었다. 종교회의 강령도 왕의 강령과는 별개로 시행되었다. 그러나 카롤링거왕조가 들어선 이후 종교회의는 왕의 통치와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왕 자신이 백성들의 이익을 위하여 왕의 이름으로 종교회의를 소집하였다. 왕이 소집하는 종교회의 참석자들은 성직자는 물론 속인도 포함되었다. 여기에서 수도원 규칙, 성직자의 의상, 성직의 면직, 퇴폐행위 등 온갖 종류의 교회문제들이 결정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종교회의는 하나의 통치기구였다. 종교회의 강령과 왕의 강령은 하나로 연결되었다. 프랑크 왕국에서 종교회의 강령은 곧 왕의 강령들로 선포되었다.

신성한 군주의 지위에 오른 프랑크 왕들의 통치하에서 대외적으로도 기독교가 널리 보급될 수 있는 전기가 마련되었다. 신의 은총을 입어 프랑크 왕이 된 피핀은 동시에 기독교 왕으로서 교회를 수호하고 신앙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띠게 되었다. 피핀은 이교도들을 상대로 활기차게 정복전쟁을 수행하였다. 피핀이 교황의 도움을 받아 왕이 된 이후의 피핀의 정복전쟁은 곧 이교도에 대한 퇴치요 기독교의 보급을 위한 전쟁이었다. 즉 교황이 원하는 교회의 수호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던 것이다. 프랑크인들은 향후 유럽이 기독교 사회가 될 수 있도록 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이것이 교회와 프랑크 왕국 간에 제휴가 지니는 큰 의미이다. 또한 이 제휴가 지니는 가장 직접적이고도 중요한 의미는 이를 계기로 서유럽 중세사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인 교황이 주도하는 기독교 공동체가 수립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는 점이다.[각주:14] 교황이 비잔티움 황제의 총독과 같은 지위에서 벗어나 기독교 세계에서 완전한 독립된 군주로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확실한 보호자를 얻을 때만이 가능한 것이었다. 당시 유럽 세계에서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하는 세력인 프랑크 왕국과 제휴를 함으로써 교황은 당장 롬바르드인들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고, 동시에 비잔티움 황제의 황제교황주의의 압렵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교황의 입장을 지지하고 후원하는 확실한 보호자를 세워 그 동안 집요하게 추구해 오던 기독교 세계에서의 최고 지배권을 획득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Ⅱ-3. 교권과 세속권의 대립


피핀 이후 프랑크 왕국의 왕이 된 자는 샤를마뉴 대제(Charlemagne)[각주:15]였다. 샤를마뉴 생의 절정기는 800년이었다. 이 해 크리스마스에 그는 교황에 의해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대관됐던 것이다. 이 사건의 분명한 사실은 샤를마뉴가 황제의 칭호를 얻음으로써 무슨 실질적인 새로운 권력을 얻게 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프랑크 왕국은 이탈리아를 지배하자마자 교황권과 교회 전체를 장악하게 되었고, 그 결과 800년경에 이르러 교황은 왕의 특별한 신하일 뿐 다른 봉건제후와 크게 다를 바 없는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의 의의는 무척 크다. 800년경에 이르기까지 황제라고는 유일하게 콘스탄티노플에 한 명 있었을 뿐이고, 그만이 아우구스투스(Augustus)의 직계 후계자임을 주장할 수 있었다. 또한 비잔틴은 비록 서유럽에 대한 관심을 잃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서유럽을 막연하게나마 제국의 변방 정도로만 간주하고 있었던 터라 서유럽인 가운데 누군가가 스스로를 황제로 부르는데 대해 극력 반대했다.

샤를마뉴의 황제 대관은 사실상 서유럽인의 자신감과 독립성을 내외에 천명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샤를마뉴의 황제 대관은 거대한 서유럽 문화 형성을 향한 중요한 이정표였다.[각주:16]


샤를마뉴 이후 프랑크 왕국은 셋으로 분열된다. 분열 이후 서로마 제국 황제의 관은 동프랑크 왕국의 오토 대제(Otto I, 912.11.23~973.5.7)[각주:17]에게로 전해진다. 당시 교황이었던 요한 12세(Joannes XII, 938?-964)[각주:18]가 962년 오토를 보호자로 요청하고 그 대가로 황제의 관을 씌운 것이다.[각주:19] 이에 따라 신성로마제국(Heiliges Römisches Reich)[각주:20]이 탄생된다. 당시 오토는 황제가 되는 조건으로(보호를 해주는 조건으로) 로마교회는 황제의 의사에 반대하는 교황을 세울 수 없다는 것과 서임권[각주:21]은 황제에게 있다는 것을 내새웠다. 이는 여전히 교황권에 비해 황제권(세속권)이 그 우위에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실제로 요한 12세는 오토에 의해 교황 직위에서 파면되었다.

한편 오토는 정복지에 봉건 제후를 임명하는 대신 세습이 되지 않고, 황제권에 의해 교체가 가능한 성직자인 주교ㆍ대주교를 임명하여 영토를 통치하기 시작한다. 이로 인해 교회의 크기는 더욱 커지게 되었고, 이후 교황권과 충돌할 때 문제가 될 소지를 남기게 된다.

이후 하인리히 3세(Heinrich III)[각주:22] 까지 황제권은 교황권에 그 절대적 우위를 다지고 있게 된다. 하지만 하인리히 3세의 아들인 하인리히 4세(Heinrich IV)[각주:23]에 이르면 이러한 사정은 점차 변화하기 시작한다. 교황이 황제의 권력에 대항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는 황제와의 결정적 차이에서 기인한다.

중세 로마 교회는 수장인 교황으로부터 하위 성직자에 이르기까지 상하의 계급 구조를 이루어 웅대한 제도적 조직을 형성하고 있었다. 각 지방의 주교와 수도원은 왕과 귀족들로부터 토지를 받아 광대한 영지를 지배하는 봉건 영주가 되었다. 특히 교황청은 직할지인 교황령에서 나오는 수입 이외에도 신자들의 기증과 로마시에서 거두어들이는 세금 등으로 다른 세속 국왕과 제후를 능가하는 유럽 제 1의 재력가가 되었다. 또한 로마 제국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켜 고도의 관료 기구도 가지고 있었으므로 권력이 분열되어 있는 국왕이나 제후들에 대하여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교회는 신의 대리자로서 봉건 제후의 전쟁에도 간섭하였고, 모든 세속적인 일에도 교회의 재판은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각주:24]

이렇게 교황의 세속적 권력이 강대해지자 지상의 최고 권력자인 황제에게 도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황제 하인리히 4세에 도전한 교황은 그리고리우스 7세(Gregorius VII)[각주:25]였다.



Ⅱ-4. 서임권 투쟁과 카노사의 굴욕(Humiliation at Canossa)


로마에서 교회개혁운동에 앞장서고 있던 클뤼니 수도원[각주:26]에서 교육을 받았던 그레고리우스 7세는 성직자들에게 절대적인 순결과 복종을 요구함과 동시에 국왕과 황제에 대한 교황의 우위를 주장했다. 즉 국왕과 황제는 교황의 명에 복종하여 세상을 개혁하고 복음화 하는 일에 기여해야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그레고리우스는 세속 군주들이 순수 세속적인 문제에 관해서만 지배권과 결정권을 계속 보유해도 좋다고 허용했다. 말하자면 선임 개혁 교황들이 교황권과 세속권의 이원성만을 추구했던 데 반해, 그레고리우스 7세는 교(敎)ㆍ속(俗) 두 영역을 모두 지배하는 교황 군주 국가를 창출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레고리우스의 교황으로서의 활동은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재위 초기부터 그는 세속 지배자가 성직자의 직무를 수여하던 의식을 반대하는 법령을 시행하기로 결정했다. 황제 하인리히 4세는 이에 반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야기된 투쟁은 서임권 문제가 중심이었으므로 통상 “서임권 투쟁”으로 불리지만, 그것은 실제로는 교황과 황제 둘 중 누가 더 강력한 권위와 힘을 갖는지를 겨룬 투쟁이었다.

1076년 1월 하인리히 4세는 보름스에서 제국의회를 소집,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를 폐위한다는 결의문을 통과시켰다. 그러자 이번엔 분노한 교황이 하인리히 4세를 파문에 처하였다. 파문은 가톨릭 세계로부터 완전 추방을 의미하는 것으로 매우 치명적인 조치였다. 한편 그레고리우스는 여타 다른 제후들과 동맹을 구축함으로써 하인리히로 하여금 수세에 몰리도록 했다. 때마침 제후들은 황제의 지배권에 반항할 구실만을 찾고 있던 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황의 파문은 제후들에게 좋은 명분을 제공해주었고, 제후들이 하인리히의 교황에 대한 불복종을 이유로 황제의 폐위를 요구하자, 막강했던 황제는 그레고리우스 7세의 사면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될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

교황은 당시 토스카나 백작 부인 마틸다(Matilda)의 카노사 성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1077년 한겨울에 하인리히는 알프스를 넘어 북이탈리아의 카노사성에서 교황 앞에 부복한다. 그레고리우스는 제후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 광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사흘 동안 내내 성문 앞에 서서 국왕의 기장들은 모두 옆에 둔 채로 맨발에 허름한 옷을 입고, 하인리히는 교황의 도움과 위로를 간청하면서 눈물을 그치지 않았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교회에 복종할 것을 서약 받은 다음 파문을 취소해 주었으나, 카노사의 사건은 황제의 위신을 크게 손상시켰다.

카노사의 굴욕 이후 하인리히 4세는 그가 당한 수모를 가슴에 품은 채 귀국하여 왕권의 재건에 진력하였다. 어느 정도 왕권이 안정되어 갈 무렵 교황과의 대립 당시 하인리히 4세를 배반하였던 제후들이 그에 대항하여 루돌프(Rudolf)를 황제로 옹립하자, 하인리히 4세는 증가된 세력을 이용하여 제후들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이런 상황을 방관할 수 없었던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1080년 하인리히 4세를 다시 파문에 처하고 제후들이 옹립한 루돌프를 황제로 승인하였다. 그러나 이미 상당한 교회세력을 확보하고 있었던 하인리히 4세는 오히려 브릭센에서 그를 지지하는 독일의 성직자들과 북부 이탈리아의 성직자들을 소집하여 그레고리우스 7세를 폐위하고 클레멘스 3세를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이어 행동에 나선 하인리히는 우선 독일 내의 반대 제후 세력을 몰아내고, 1082년 이탈리아로 쳐들어가 로마를 점령하고 그레고리우스 7세를 추방하고, 클레멘스 3세의 교황 취임을 교황청에 승인시켰다. 살레르노 지방으로 피신한 그레고리우스 7세는 1085년 눈을 감았다. 결국 카노사의 굴욕 사건은 교황이 독일 제후와 동맹할 수 있는 호기를 놓치게 한 반면, 황제는 시간을 벌게 되어, 실리 면에서 황제의 정치적 승리로 평가할 수 있다.


하인리히 4세와 그레고리우스 7세의 싸움은 일단 하인리히 4세의 승리로 끝이 났다. 그러나 교황과 황제의 치열한 대립이 일단락된 것은 하인리히 4세와 그레고리우스 7세가 죽고 난 다음이었다. 1122년에 마침내 황제 하인리히 5세(Heinrich V)[각주:27]와 교황 칼릭스투스 2세(Callistus Ⅱ)[각주:28] 사이에 타협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보름스 협약(Concordat of Worms)이다. 이 협약으로 성직 임명권은 교황의 권리로 하되 성직자에게 내리는 토지는 국왕의 권한 하에 두게 되었다. 황제가 성직자의 서임권을 포기한 것으로 프랑크 왕국이래의 세속권 우월의 전통이 사라졌으며, 교권이 속권보다 우위에 있음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후 교황권은 독일 내 Staufen가문과 Welfen가문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자리를 놓고 싸운 분쟁에서 정당한 황제를 교황이 임명하는 과정을 겪음으로 절정을 향하게 된다. 그 결과 13세기 초 이노센트 3세(Innocentius III)[각주:29]에 이르러 교황권은 최고 절정에 이르게 된다. 그는 독일 내정에 간섭하여 자신이 내새운 후보인 Staufen가문의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각주:30]를 황제로 선출케 하고, 1201년 프랑스 왕 필립 2세의 이혼 문제에 간섭하였다. 그리고 영국의 내정에 간섭하여 존왕이 원치 않는 인물을 캔터베리 대주교로 받아들이도록 했다.  교황의 우위를 과시하고 세입을 늘리기 위해 존왕을 굴복시켜 영국 전체의 영토를 교황에게 바치게 하여 다시 봉토를 수여하였다. 그는 또한 아라곤(Aragon)[각주:31], 불가리아, 덴마크, 헝가리, 폴란드, 포르투갈, 세루비아의 군주들로 하여금 봉건 가신으로서의 신종을 맹세하게 하였다. 이노센트 3세에 의하면, 교황은 세속 군주의 심판자이다. 그리고 그는 “교황은 태양이며 황제는 그 빛을 빌려서 반짝이는 달”이라고 하여 교황의 우월권을 과시하였다. 11세기 후반부터 13세기 후반까지 약 200년 동안 전개된 십자군 운동은 교황권의 절정을 나타낸 것으로 중세 유럽에서 기독교의 세력이 얼마나 강성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각주:32]



Ⅱ-5. 교황권의 몰락


교황의 세속권은 보니파키우스 8세(Bonifacius Ⅷ, 1294-1303) 치세에 극적으로 실추되었다. 보니파키우스가 겪은 많은 어려움은 그 자신이 초래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마주친 가장 큰 장애물은 국민적 군주 국가가 교황 이상으로 신민들의 충성심을 끌어 모았다는 것이다. 왕권은 견실하게 성장했고, 반면 교황권은 점점 쇠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십자군이 실패함으로써 교황의 권위는 실추되었고, 교회의 타락에 따른 이단이 등장하여 더욱 부채질하였다.

결정적으로는 잉글랜드 및 프랑스 국왕들과의 두 가지 논쟁으로 인해 보니파키우스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 첫 번째는 이노센트 3세에 의해 시작된 성직자 납세 문제에 관련된 것이다. 이노센트는 십자군을 지원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그 자신이 세금을 거두어들였다. 그러나 13세기를 경과하는 동안 잉글랜드와 프랑스에서는 앞으로 있을 성지 십자군이나 Staufen가문에 대한 교황의 십자군에서 교황을 돕기 위해 사용한다는 구실로, 국왕들이 성직자로부터 세금을 부과ㆍ징수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13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아무런 구실이나 변명도 대지 않고 자신들의 전쟁 자금 충당을 위해 성직자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들이기 시작했다. 보니파키우스가 이러한 시도를 막으려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이 이미 잉글랜드 및 프랑스의 성직자들로부터 지지를 잃었음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왕들이 저항했을 때 그는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보니파키우스의 두 번째 논쟁은 프랑스 왕과의 사이에서 벌어졌다. 이 논쟁은 필립 4세가 프랑스의 주교 한 사람을 반역죄로 재판하기로 한 것과 관련이 있다. 과거 그레고리우스 7세와 하인리히 4세 사이의 투쟁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사건의 진짜 핵심은 교황권과 세속권 중 누가 더 우위에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교황이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종전과 마찬가지로 격렬한 선전전이 벌어졌지만, 이제는 거의 아무도 교황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왕은 보니파키우스에 대해 터무니없는 이단 혐의를 걸었고, 부하를 보내 교황을 체포해서 재판에까지 회부했다. 이 사건으로 늙은 교황은 기력이 쇠진되었고 결국 몇 달 후에 사망하고 말았다.

이 사건이후 305년 선출된 프랑스인 교황 클레멘스 5세는 프랑스왕의 강력한 간섭을 받았으며, 로마로 들어가지 못한 채 프랑스에 체류하게 되었다. 교황은 초기에 아비뇽 북동쪽에 있는 카르팡트라스에 정청을 설치하고 아비뇽에 거주했으나, 제4대 클레멘스 6세 때인 1348년 프로방스 백작 겸 시칠리아 여왕으로부터 아비뇽을 사들여 파리 왕궁을 모방한 호화스러운 교황청 궁전을 건조하였다. 제6대인 우르바노 5세 때 일시 로마로 복귀하였으나 교황청의 주요 기능은 아비뇽에 잔류하였고, 그레고리오 11세에 의해 본격적인 로마 복귀가 이루어질 때까지 역대의 프랑스인 교황이 독자적인 프랑스적 교황청 행정을 담당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아비뇽 유수(Avignonese Captivity)[각주:33]이다. 이는 교황 권위의 추락을 일으켜 교회의 분열이 일어나게 한다.[각주:34]



Ⅳ. 결론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중세의 기독교는 로마가톨릭을 중심으로 크게 발전하여 정치ㆍ사회ㆍ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본고에서 주로 다뤘던 정치 문제에 있어서도 가톨릭 세계의 수장이었던 로마 교황은 단순히 정신을 지배하는 종교계의 수장으로 남지 않고, 끊임없이 세속 권력과 충돌하며 세속권력을 장악해간다. 유럽 중세사의 정치 분야에 있어서 가톨릭과 교황은 빠질 수 없는 필수적인 요소이며, 중세 유럽이 형성되고 발전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근대로 시대가 점차 이행해가면서 사람들은 근대적인 의미의 국민국가를 인식하게 되었고, 보편적 세계제국[각주:35]의 권위 위에 세워진 교황의 권위는 점차 약해져간다. 더 나아가 르네상스 이후 사람들은 신을 벗어나 인간을 재발견 하여 점차 신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 때 만연해 있던 가톨릭 세계의 부패와 부조리함은 이러한 경향을 부채질 하였다. 이에 따라 가톨릭교회의 수장이었던 교황의 권위는 갈수록 떨어지게 되었고, 더 이상 가톨릭만이 유일한 종교로 인정받지 않는 세계로까지 나아간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각주:36]로 시작된 종교 개혁이 그것이다. 이전까지의 종교개혁 운동[각주:37]이 단순히 이단으로 몰려 실패하였던 것과는 다르게 떨어진 가톨릭교회와 교황의 위상은 새로운 종교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새로운 시대인 근대의 시작과 함께한다.

이처럼 가톨릭세계와 교황권은 중세와 그 시작을 함께하며 발전하여, 중세를 이루는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는 요소가 되었으며, 중세가 몰락함과 동시에 함께 그 세력이 몰락해간다. 중세를 나타내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로 많은 사람들이 가톨릭교회와 교황을 꼽는 이유이다.

하지만 중세와 이를 이루는 가장 큰 요소인 가톨릭-기독교는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갖게 한다. 중세는 현재의 유럽을 탄생하게 하였으며, 가톨릭은 새롭게 탄생한 중세 유럽에 보편성을 심어 주었다. 이에 따라 유럽인들은 여전히 유럽이라는 보편적 세계 속에 살아가며, 고대 이후로 분열된 자신들의 세계를 하나로 통합하고자 현재도 노력하고 있다. 유럽연합이 그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히틀러의 소련 침공에서도 보이듯이[각주:38] 기독교를 위시한 서유럽 세계는 동아시아에 사는 우리와는 다른 의미의 공동체 의식이 엿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이를 이해하는데 중세 유럽에 있었던 기독교의 발전은 필자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참고 문헌>


E.M. 번즈ㆍR. 러너ㆍS. 미첨, 박상익 옮김, 『서양 문명의 역사Ⅱ』소나무, 1994.

김진웅ㆍ손영호ㆍ정성화, 『서양사의 이해』학지사, 1994.

클라우디아 메리틀, 배진아 옮김,『누구나 알아야 할 서양 중세 이야기』플래닛미디어, 2006.

티모시 존스,『하루 만에 꿰뚫는 기독교 역사』규장, 2007.


이경구,「로마교회와 프랑크왕국의 제휴 -피핀의 쿠데타를 중심으로」한국서양중세사학회,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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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敎皇權과 프랑크 王國의 同盟」대구사학회,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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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본고에서는 Roman Catholic, Eastern Orthodoxy, Protestant Church를 구분하기 위해 ‘기독교’ 라는 용어 대신, 가톨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도록 하겠다. 단 이러한 구분을 하지 않아도 될 때에는 기독교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겠다. [본문으로]
  2. 비잔틴 제국의 황제(재위 527∼565). 뛰어난 통솔력으로 측근들을 기용하여 옛 로마 서방의 영토 재정복의 꿈을 실현시키고,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고대 로마 법학자들의 ‘학설집’, ‘법학 입문’ 및 법전 편찬 이후에 유스티니아누스가 반포한 ‘신법’으로 이루어진 《로마법 대전》을 완성하였다. [본문으로]
  3. 프랑크왕국의 초대 국왕(재위 481∼510)으로 메로빙거 왕조의 창시자이다. 전 프랑크족을 통합하여 프랑크 왕국을 수립하였고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로마 교황과의 우호관계를 보증하게 되었다. [본문으로]
  4. 클로비스는 다른 게르만족과는 다르게 아리우스파(Arianism)가 아닌 아타나시우스(Athanasius)파로 개종하였다. 이 둘의 차이는 대표적으로 삼위일체(三位一體, trinitas)설에 있다. 이는 오늘날 기독교의 일반적인 교리로, 하느님은 성부(聖父)·성자(聖子) 및 성령(聖靈)의 세 위격(位格)을 가지며, 이 세 위격은 동일한 본질을 공유하고, 유일한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교리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으로 인정한 것으로, 325년 니케아공의회(公議會)에서 교회의 정통신조로 공인되었으며, 이를 인정하지 않은 아리우스파는 이단으로 인정되었다. 프랑크 왕국은 로마인들이 믿는 아타나시우스파로 개종함으로써 유럽에 그 뿌리를 비교적 확고하게 내릴 수 있었다. [본문으로]
  5. Merovingian dynasty, 프랑크왕국 전반기의 왕조(481∼751). 명칭은 클로비스가 속한 부족의 시조인 메로베우스(Meroveus)의 이름에서 따왔다. [본문으로]
  6. 궁재와 백작령의 설치는 봉건제도의 모태가 되기도 한다. 또한 이때 백작령은 그 지역 사람을 임명하도록 규정하여서, 이후 봉건 제후들의 법적 근거가 된다. [본문으로]
  7. 게르만어로는 동쪽 나라를 의미하며, 지명(地名)으로서는 6세기 후반에서 8세기까지 쓰였다. 지역은 갈리아 북동부에 해당하며, 프랑스 북부 메스를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 대략 511년 클로비스의 죽음 뒤에 행해진 분할 때의 티에리 왕국에 해당한다. 613년 클로타르 2세의 왕국 통일 후의 재분할에서 분국명으로 정착하였으며, 다른 여러 분국과 더불어 궁재직(宮宰職)을 두었다. 뒤의 카롤링거왕조는 아우스트라시아 궁재의 가계에서 배출되었다. [본문으로]
  8. ‘새로운 국토’라는 뜻이지만 비(非)아우스트라시아(Austrasia)라는 뜻도 된다. 메로빙거왕조 때의 프랑크왕국의 영토는 처음에는 여러 개의 분방(分邦)으로 나누어졌으나, 차차 아우스트라시아와 네우스트리아의 2분국이 되었다. 전자는 남서 독일에서 프랑스의 북부에 이르는 왕국의 북동부에 위치하였고, 후자는 센강 유역을 중심으로 왕국의 서부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9세기 이래 그 지역이 점점 좁아져서, 11∼12세기의 네우스트리아는 노르망디 북방만을 가리키게 되었다. [본문으로]
  9. 이로 인해 제국의 중심지는 동쪽으로 이동하게 된다. [본문으로]
  10. 왕가의 계보가 대(大)피핀과 메츠의 주교 아르눌프까지 올라가기 때문에 아르눌핑가(家)라고도 한다. 메로빙거 왕조 말기 프랑크왕국의 권력은 궁재(宮宰)에게로 집중되었다. 688년에 중(中)피핀이 프랑크왕국 전체의 궁재(宮宰)가 되었고, 그 아들 카를 마르텔(Charles Martel)이 732년에 투르와 푸아티에 사이에서의 전쟁에서 이슬람교도의 침입을 격퇴함으로써 프랑크왕국의 실질적 지배자가 되었는데, 751년에 카를 마르텔의 아들 소(小)피핀은 쿠데타로 메로빙거왕조 최후의 왕 힐데리히 3세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본문으로]
  11. 프랑크 왕국 내의 다른 부족장들을 설득한 대의명분을 로마 교황이 주었다. [본문으로]
  12. 이전 시기인 6세기 경 동고트족이 이탈리아를 점령했을 때에는 비잔틴의 유스티니아누스의 구원을 받았고, 라벤나(Ravenna)에 Patricius Romanorum이 설치 되었었다. 하지만 8세기 경의 비잔틴은 이탈리아를 구원할 힘이 남아있지 못했다. [본문으로]
  13. 왕은 특별한 신의 대리인으로 세례 대신 기름을 붓는다. [본문으로]
  14. 이후 1250년까지 모든 장원에 교회가 보급되었다. 교회가 보급됨으로써 7성사를 통해 교회는 일반 사람들을 장할 수 있었다. hamlet에서 village로의 변화. [본문으로]
  15. 카롤링거 왕조의 제2대 프랑크 국왕(재위 768~814). 몇 차례의 원정으로 영토 정복의 업적을 이루고 서유럽의 정치적 통일을 달성했다. 중앙집권적 지배를 가능하게 하면서 지방봉건제도를 활용했고 로마 교황권과 결탁하여 서유럽의 종교적인 통일을 이룩하고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이룩했다. 카를 대제 혹은 카를로스 대제라고도 불린다. 새로운 왕조인 카롤링거 왕조의 이름은 여기서 유래하였다. [본문으로]
  16. 하지만 당시 샤를마뉴의 직위는 Imperator Romanorum et Rex Francorum 으로 단순히 두 왕관의 결합을 의미한다. 아직 로마인과 게르만족의 화합이 완벽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단지 로마 제국의 후계자임을 인정받은 것일 뿐이었다. [본문으로]
  17. 독일 국왕(재위 936∼973)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재위 962∼973). 주교 ·대수도원장을 왕권의 정치적 지주로 삼고 교회령을 물질적 토대로 하는 제국교회정책을 확립하였다. 이탈리아 원정으로 독일 왕권을 초독일적인 황제권으로 높였으며 문학 ·예술의 융성을 가져왔다. 작센 왕조. [본문으로]
  18. 본명은 옥타비아누스. 로마 교황(재위 955∼963). 교회의 ‘철의 세기(世紀)’의 대표적 인물로 신성로마제국 초대 황제 오토에게 파면당하였다. 황제에 의해 폐위된 교황의 전례가 되었다. [본문으로]
  19. 오토가 받은 직위는 Imperator Romanorum et Francorum 으로 로미인과 게르만족이 비로소 통합되었음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20. Heiliges Römisches Reich. 962년에 오토 1세가 황제로 대관한 때로부터 프란츠 2세가 제위(帝位)를 물러난 1806년 8월까지에 걸쳐 독일 국가 원수(元首)가 황제 칭호를 가졌던 시대의 독일제국의 정식 명칭. 신성로마제국은 고대 로마제국의 부활·연장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에 로마제국이라 불렸고, 또 고대 로마의 전통 보존자인 그리스도교회와 일체라는 뜻에서 신성(神聖)이라는 말을 붙였다. 그러나 실제로 신성로마제국의 호칭이 쓰이기 시작한 것은 15세기로서 그 이전은 단순히 제국 또는 로마제국이라 불렸다. [본문으로]
  21. 성직서임권(聖職敍任權). 가톨릭의 주교, 수도원장 따위의 성직을 임명하는 권한. [본문으로]
  22. 중세 독일의 잘리에르왕조 제2대 국왕, 신성로마 황제(재위 1039∼1056). 독일 최강의 지배자였다고 한다. 왕권을 공고히 하고, 베멘·헝가리를 정복해 독일 왕의 종주권(宗主權)을 인정하게 만들었다. 제1회 이탈리아 원정에서 대립하는 3교황을 한꺼번에 추방하고, 새 교황으로 클레멘스 2세를 세우는 등 로마 교황을 완전히 자기 지배 아래 두었다. [본문으로]
  23. 중세 독일 잘리에르왕조 제3대 국왕, 신성로마제국 황제(재위 1057∼1106). 모후 아그네스의 섭정 때 상실한 왕령(王領)의 회복을 위해 지방제후들과 대립, 반란을 초래했다. 그 와중에 교황 그레고리오 7세와의 사이에서 서임권(敍任權) 문제로 충돌하여 파문을 당하고, 궁지에 몰리자 교황에게 사면을 간청하여 겨우 파문의 해제를 받은 이른바 ‘카노사의 굴욕’을 겪었다. [본문으로]
  24. 한편 황제의 권력은 당시 봉건체제 하에서 절대적인 군주권을 누리기는 힘들었다. 또한 강력한 제후들에게 힘을 얻은 교황과 황제의 대립은 황제를 배신할 좋은 명분이 될 것이다. [본문으로]
  25. 중세교회개혁운동을 지도하고 로마 교황권의 전성기를 이룩한 교황(1073~1085). [본문으로]
  26. 수도원 개혁 운동은 910년에 클뤼뉘 수도원이 설립되면서 시작되었다. 그 내용으로는 첫째, 세속 권력이나 교회 권력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해 수도원을 교황 직속으로 했다. 둘째, 종전의 모든 베네딕트 수도원들이 제각기 독립적이고 대등했던 데 비해, 클뤼뉘 수도원은 조직을 구성하여 속한 수도원들로 하여금 클뤼뉘의 명령에 복종하도록 하였다. 이후 클뤼니 교단의 세력은 급속히 성장하여 1049년에는 67개를 헤아리게 된다. [본문으로]
  27. 잘리에르왕조 최후의 독일 국왕, 신성로마제국 황제(재위 1106∼1125). 서임권(敍任權) 투쟁을 종결시켰으며 처음에는 교황과 대립하였으나, 이후 교황 칼릭스투스 2세와 보름스협약을 맺고 타협하였다. 이 협약으로 이탈리아와 부르군트에서의 황제의 교회에 대한 영향력은 완전히 상실되었다. [본문으로]
  28. 제162대 교황(재위 1119~1124). [본문으로]
  29. 교황권 신장에 크게 공헌한 로마의 교황(1198∼1216)이다. 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가 죽은 뒤 독일의 복잡한 정정을 기화로, 로마냐·마르크안코나 등지의 황제령을 교황령에 합병하였다. 재임 중 제4회 십자군(1202∼1204)이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했다. [본문으로]
  30. 슈타우펜왕조 최후의 신성로마 황제(재위 1215∼1250). 시칠리아의 왕으로서 1212년 독일왕이 되었으며, 제6차 십자군을 일으켜서 예루살렘 왕국을 수립하고 예루살렘왕이 되었다. [본문으로]
  31. 스페인 북동부의 옛 왕국. 현재의 지명. [본문으로]
  32. 1215년 제 4차 lateran 종교회의에서는 대관식이 정의되는데, 대관식은 교황이 주관하는 것으로, 불완전한 통치자 Rex를 완전한 통치자 Imperator로 만드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이는 황제에 대한 교황권의 우위를 대관식을 통해 입증한 것으로 교황권의 최고 극치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본문으로]
  33. 1309∼1377년까지 7대에 걸쳐 로마 교황청을 남프랑스의 론강변의 도시 아비뇽으로 이전한 사건. [본문으로]
  34. 1378년 로마에서 우르바노 6세가 선출되자 프랑스인파(人派)는 이에 불만을 품고 대립되는 교황 클레멘스 7세를 내세워 또다시 아비뇽에 교황청을 열어 1417년까지 존속시켰다. 교회의 자체적 분열. [본문으로]
  35. 로마제국 [본문으로]
  36. 독일의 종교개혁자이자 신학자. 면죄부 판매에 '95개조 논제'를 발표하여 교황에 맞섰으며 이는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었다. [본문으로]
  37. 위클리프와 후스의 종교개혁 운동 등 [본문으로]
  38. 독ㆍ소 전쟁에서 히틀러는 공산주의-전체주의에 맞서 기독교 자유주의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침공했다. [본문으로]
Posted by so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