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henae (2) Solon의 개혁
Papers/History :
2009. 6. 22. 00:40
* Dracon의 성문법 (BC 621)
: BC 7c 후분부터 발생했던 Hektemoroi 계층은 아테네의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드라콘의 입법이 이루어진다. 당시의 상황에서 우리가 눈여겨 볼 내용은 이 법이 "부채로 인한 자유의 상실"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이는 귀족들의 의견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아테네 최초의 성문법으로 귀족들의 자의적인 법률 해석의 남용을 방지하였다는 의미가 있다. 1
* Solon의 개혁(BC 593~591) 2
기본적으로 아테네 사회를 자영농이 많은 건강한 사회로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개혁이 성공하려면 개인의 능력 뿐 아니라, 지지기반도 중요하다. 솔론의 개혁은 실패했지만, 민주주의의 첫 시도였다는 점에서 가치를 갖는다.
개혁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Seisactheia (부채 말소)
2. Timocracy (금권정치)
: 결국 솔론은 하층민들이 더 이상 부채로 인해 자유가 상실되지 않기를 위해, 부채 말소를 추진한다. 우리가 솔론의 개혁에서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금권정치는 이러한 부채 말소에 대한 귀족들의 반대를 무마하려는 반대급부의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금권정치의 내용은 살펴보면,
- 재산을 기준으로 시민들을 4개의 신분으로 나눈다.
1신분 : Pentacosiomedmnoi
2신분 : Hippeis
3신분 : zeugitai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기까지를 자영농을 보면 된다.
4신분 : Thetes (거의 대부분 hektemoroi이다.) 3
2신분 : Hippeis
3신분 : zeugitai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기까지를 자영농을 보면 된다.
4신분 : Thetes (거의 대부분 hektemoroi이다.) 3
- 위와 같이 재산에 따른 신분제도에 따라 정치적 권한이 달랐는데, 이를 금권정치라고 한다.
- 4신분 까지는 모두 Ecclesia에 참여할 권리가 있었다.
- 3신분 이상의 신분만이 '400인 위원회'에 참여할 수 있었다.
- 2신분 이상의 신분만이 Archon과 Areopagos에 참여할 수 있었다.
- 1신분만이 신관(명예직)이 될 수 있었다.
3. 행정 개혁 (400인 위원회)
: 400인 위원회를 만들어 실질적인 행정 업무와 원로원의 민회 의안 상정 권한을 대신하게 하였다. 이는 귀족 원로원의 권한 축소를 노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400인 위원회는 혈연 중심의 부족제를 넘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었다. 4
그리고
아테네는 4개의 부족이 연합하여 이루어진 폴리스로,
각각의 부족에서 3시분 이상의 시민 100명씩을 추첨으로 선출하여 400인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400인 위원회 중 각각의 100명에서 10명씩을 선거로 선출하였는데, 이를 40인 위원회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선출된 40명 중에서 9명의 Archon을 추첨으로 선출하였다.
각각의 부족에서 3시분 이상의 시민 100명씩을 추첨으로 선출하여 400인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400인 위원회 중 각각의 100명에서 10명씩을 선거로 선출하였는데, 이를 40인 위원회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선출된 40명 중에서 9명의 Archon을 추첨으로 선출하였다.
여기에서 눈여결 볼 점은 두번째 과정이다. 40인을 선출하는 과정에서 사용된 방법은 '선거'인데, 추첨과는 달리 선거에서는 1,2신분의 귀족들이 유리할 수 밖에 없다. 그 결과 정무관의 후보가 되는 40인에는 귀족들만이 남는 결과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 또한 솔론의 행정 개혁이 아테네 민주주의의 발전 과정에서 갖는 한계라고 할 수 있다.
(결과)
: 솔론의 개혁은 실패하였는데, 이는 하층민과 지배층 모두의 지지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층민의 입장에서 '부채 말소' 만으로는 다시 부채가 발생하는 필연적 귀결을 해결받을 수 없었다. 이는 위의 내용에서 살펴보듯이 토지 개혁과 토지 분배가 개혁과 함께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지배층의 입장에서도 Archon 9명을 장악하는 것은 기존의 지배 구조와 비교했을 때 큰 장점을 갖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특권이 부분적으로나마 사라진 것도 존재한다. 이와 같은 개혁 내용으로 솔론은 아테네 시민 계층 중 누구에게도 지지를 받기 어려웠다. 지지기반이 없는 개혁은 성공할 수 없다.
어느 역사에서나 사회에서나 개혁이 요구될 때 이루어지지 못하면, 혼란이 찾아온다.
솔론의 개혁이 실패한 후 아테네는 혼란과 내전에 휩싸이게 되고, 참주정의 시기가 찾아온다.
* 본 게시물을 동의 없이 이용할 시 책임이 따릅니다.
* 본 게시물은 학생 시절 필기 노트에 근거합니다.
- http://soulation.tistory.com/50 [본문으로]
- 민주주의로의 첫 시도였으나, 실패하였다. 개혁을 추진하였던 솔론은 외국에서 돈을 번 인물로 아테네에 기반이 없었다. 이러한 배경은 개혁의 추진력이자 동시에 실패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본문으로]
- 당시 인구 비율을 보면, 1~2 신분을 합친 수가 약 500명 정도, 3신분이 9000명, 소작농인 4신분이 12000명 정도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 혈연 중심의 부족적 전통은 부족을 장악하고 있는 인물들(부족을 장악하고 있는 이들이 귀족이다.), 당시로서는 귀족들의 권력이 강함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Papers > Hi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Athenae (4) Chleisthenes의 개혁 (BC 508) (0) | 2009.07.11 |
---|---|
Athenae (3) Peisistratos의 참주 정치 (1) | 2009.07.10 |
Athenae (1) BC 7c 아테네의 귀족 사회 (1) | 2009.06.13 |
조선시대 농민의 경제생활 (1) | 2009.06.12 |
Sparta - 스파르타의 사회 구조 (1) | 2009.06.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