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racon의 성문법 (BC 621)

 : BC 7c 후분부터 발생했던 Hektemoroi 계층은 아테네의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각주:1] 이러한 상황에서 드라콘의 입법이 이루어진다. 당시의 상황에서 우리가 눈여겨 볼 내용은 이 법이 "부채로 인한 자유의 상실"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이는 귀족들의 의견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아테네 최초의 성문법으로 귀족들의 자의적인 법률 해석의 남용을 방지하였다는 의미가 있다.


* Solon의 개혁[각주:2](BC 593~591)

기본적으로 아테네 사회를 자영농이 많은 건강한 사회로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개혁이 성공하려면 개인의 능력 뿐 아니라, 지지기반도 중요하다. 솔론의 개혁은 실패했지만, 민주주의의 첫 시도였다는 점에서 가치를 갖는다.
개혁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Seisactheia (부채 말소)

2. Timocracy (금권정치)

  : 결국 솔론은 하층민들이 더 이상 부채로 인해 자유가 상실되지 않기를 위해, 부채 말소를 추진한다. 우리가 솔론의 개혁에서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금권정치는 이러한 부채 말소에 대한 귀족들의 반대를 무마하려는 반대급부의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금권정치의 내용은 살펴보면,
  - 재산을 기준으로 시민들을 4개의 신분으로 나눈다.

1신분 : Pentacosiomedmnoi
2신분 : Hippeis
3신분 : zeugitai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기까지를 자영농을 보면 된다.
4신분 : Thetes (거의 대부분 hektemoroi이다.)[각주:3]

  - 위와 같이 재산에 따른 신분제도에 따라 정치적 권한이 달랐는데, 이를 금권정치라고 한다.
  
  - 4신분 까지는 모두 Ecclesia에 참여할 권리가 있었다.
  - 3신분 이상의 신분만이 '400인 위원회'에 참여할 수 있었다.
  - 2신분 이상의 신분만이 Archon과 Areopagos에 참여할 수 있었다.
  - 1신분만이 신관(명예직)이 될 수 있었다.


3. 행정 개혁 (400인 위원회)

  : 400인 위원회를 만들어 실질적인 행정 업무와 원로원의 민회 의안 상정 권한을 대신하게 하였다. 이는 귀족 원로원의 권한 축소를 노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400인 위원회는 혈연 중심의 부족제를 넘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었다.[각주:4]

  그리고

  아테네는 4개의 부족이 연합하여 이루어진 폴리스로,
  각각의 부족에서 3시분 이상의 시민 100명씩을 추첨으로 선출하여 400인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400인 위원회 중 각각의 100명에서 10명씩을 선거로 선출하였는데, 이를 40인 위원회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선출된 40명 중에서 9명의 Archon을 추첨으로 선출하였다.

  여기에서 눈여결 볼 점은 두번째 과정이다. 40인을 선출하는 과정에서 사용된 방법은 '선거'인데, 추첨과는 달리 선거에서는 1,2신분의 귀족들이 유리할 수 밖에 없다. 그 결과 정무관의 후보가 되는 40인에는 귀족들만이 남는 결과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 또한 솔론의 행정 개혁이 아테네 민주주의의 발전 과정에서 갖는 한계라고 할 수 있다.


  (결과)
  : 솔론의 개혁은 실패하였는데, 이는 하층민과 지배층 모두의 지지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층민의 입장에서 '부채 말소' 만으로는 다시 부채가 발생하는 필연적 귀결을 해결받을 수 없었다. 이는 위의 내용에서 살펴보듯이 토지 개혁과 토지 분배가 개혁과 함께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지배층의 입장에서도 Archon 9명을 장악하는 것은 기존의 지배 구조와 비교했을 때 큰 장점을 갖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특권이 부분적으로나마 사라진 것도 존재한다. 이와 같은 개혁 내용으로 솔론은 아테네 시민 계층 중 누구에게도 지지를 받기 어려웠다. 지지기반이 없는 개혁은 성공할 수 없다.

  어느 역사에서나 사회에서나 개혁이 요구될 때 이루어지지 못하면, 혼란이 찾아온다.
  솔론의 개혁이 실패한 후 아테네는 혼란과 내전에 휩싸이게 되고, 참주정의 시기가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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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게시물은 학생 시절 필기 노트에 근거합니다.


  1. http://soulation.tistory.com/50 [본문으로]
  2. 민주주의로의 첫 시도였으나, 실패하였다. 개혁을 추진하였던 솔론은 외국에서 돈을 번 인물로 아테네에 기반이 없었다. 이러한 배경은 개혁의 추진력이자 동시에 실패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본문으로]
  3. 당시 인구 비율을 보면, 1~2 신분을 합친 수가 약 500명 정도, 3신분이 9000명, 소작농인 4신분이 12000명 정도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4. 혈연 중심의 부족적 전통은 부족을 장악하고 있는 인물들(부족을 장악하고 있는 이들이 귀족이다.), 당시로서는 귀족들의 권력이 강함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Posted by so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