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테네의 혼란 시기 (BC 591~560)

 : 일반적으로 'Archon이 없는 시대', 즉 Anarchia 라고 불린다.[각주:1]

 솔론의 개혁이 실패한 후 아테네는 평야파해안파가 대립하는 혼란시기가 찾아온다.

 토지귀족이고 Lycorgos와 Isagoras로 대표되는 이들이 평야파이며, 신흥 상공업자들이며 중산층을 대표하는 Megacles와 그의 아들 Chleisthenes[각주:2]가 속한 편이 해안파이다.

 이들의 대립 속에서 새로운 파벌이 등장하는데, 빈민 계층인 Thetes의 숫적 지지를 등에 업고 등장한 Peisistratos산악파가 그것이다.

 산악파의 등장으로 균형은 깨지고, 해안파와 산악파의 연합으로 아테네에서 평야파는 축출된다. 이후 해안파와 산악파는 다시 대립하게 되는데, 이때 승리한 것은 해안파였다. 이 때 페이시스트라토스도 아테네에서 쫓겨난다. (BC545)

 아테네에서 쫓겨난 페이시스트라토스는 그리스 북부의 마케도니아 지역에서 Pangaion 금광을 발견하고, 그 재력을 바탕으로 군대를 조직, 마라톤 평야에 상륙 후[각주:3] 아테네에 진격하여 BC545년에 메가클레스와 그의 아들 클레이스테네스를 축출한다.[각주:4] 이로써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참주정치는 시작된다.




* Peisistratos의 참주 정치

 1. 4신분인 Thetes의 숫적 지지를 기반으로 한 통치이다.

 이러한 이유로 페이시스트라토스는 테테스 계층을 위한 개혁을 시도한다. (장기 집권을 위함이다.)

2. 토지 분배 : 추방당한 평야파(토지 귀족)의 토지를 이용했다. 분배의 기준은 '추첨'과 '필요'였다. 추첨은 땅의 비옥도를 추첨한 것을 말하고, 필요는 예를 들어 부양 가족의 수와 같은 것들이었다. 이러한 토지 분배를 통해 페이시스트라토스는 테테스 계층의 계속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한편 토지세는 1/12에 불과했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재력이 충분하였다. 그는 자신의 재력을 이용해 아테네를 통치했다.[각주:5]

3. 비극 경연 대회 : 여느 독재자가 그러하듯이 페이시스트라토스 역시 일반 민중들의 관심을 정치로부터 돌리기 위해 오락을 제공했다.[각주:6] 이는 명백한 독재 유지책이었지만, 한편 이러한 페이시스트라토스의 공헌으로 그리스 비극의 수준은 높아져 1세기 후 아테네 문화 발전에 이바지한다.[각주:7]

4. 인질제도 : 독재를 유지하기 위해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정적의 친척을 인질로 잡아 두었다.

 

* Peisistratos 사후 그의 정권은 아들들에게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의 아들 둘의 이름은 각각 Hippias와 Hipparcus였는데, 큰 능력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히파르쿠스는 자신의 남자 애인에게 암살을 당하는데, 이는 질투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두 아들의 무능력을 틈타 스파르타로 망명해 있던 Chleisthenes가 망명지인 스파르타의 도움을 받아 아테네의 정권을 장악하고, 남아있던 Hippias를 쫓아낸다. 이를 통해 클레이스테네스의 민주정치 시기가 찾아온다. 힌퍈 쫓겨난 히피아스는 페르시아로 망명하는데, 이후 페르시아 전쟁이 일어났을 때 페르시아 편에 서서 아테네 침략에 도움을 준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참주 정치 기간은 독재 정치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물론 민주주의에 반대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테네는 필요악으로써 페이시스트라토스라는 강력한 독재자의 통치 기간 동안에 토지 분배를 이룬다. 또한 문화 발전에도 도움을 받는다. 둘 모두 후대 아테네의 전성기 시절, 민주주의를 이룩하는데, 또한 우리가 알고 있는 수준 높은 아테네 문화를 이룩하는데 높은 기여을 하였다. 특히 토지 분배의 경우에, 강력한 독재자가 아니라면 이런 정도의 개혁을 밀어 붙이기 어렵다. 우리는 역사에서 이러한 부의 분배를 위한 개혁이 기득권 세력에 막혀 좌절되는 경우를 수도 없이 지켜보았다.
 국가가 망하고 사라지는 이유는 대부분이 내적인 부의 불균형 현상이다.[각주:8] 어찌되었든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솔론이 하지 못했던, 클레이스테네스와 페리클레스가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던 정책을 훌륭하게 이루어 내었다. 그리고 아테네는 이를 통해 빈민을 구제하고 민주주의를 시도할 수 있게 된다.[각주:9]

 결국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어쨌든 아테네의 역사에 일정 부분 긍정적으로 작용하였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점이 있다. 난 민주주의가 이상적인 정치체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각주:10] 결국 중요한 것은 당시의 정치체제가 역사에 긍정적인 방향으로 전개되었는가, 그리고 당시의 일반인들의 삶은 어떠하였는가, 가 중요하다. 후자의 경우에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하겠지만, 전자의 경우에는 상당 부분 긍정적이다.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위기의 상황에 자신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국민들을 '이끌고 있다고' 생각 하고 계시는 분이 생각해 볼 대목이다.[각주:11] 긍정적인 결과라는 것이 무엇일지,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생각했던 운명 공동체가 누구였는지 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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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당신이 anarchism과 연관지어 생각 했다면, 정답이다!! [본문으로]
  2. 도편추방제로 유명한 클레이스테네스다. 클레이스테네스는 페이시스트라토의 참주정이 끝난 후 아테네 민주정치를 이끈 유명한 인물이다. [본문으로]
  3. 페르시아 전쟁 때 역시 페르시아는 마라톤 평야에 군대를 상륙시킨다. 이때 페르시아에 조언을 했던 인물이 후에 등장하는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아들인 히피아스이다. 아버지의 경험을 페르시아에 물려준 것으로 보면 된다. [본문으로]
  4. 메가클레스와 클레이스테네스는 스파르타로 망명한다. 이후 페이시스트랕토스가 죽고 아테네에 다시금 혼란이 왔을 때, 클레이스테네스는 스파르타의 도움으로 아테네의 정권을 잡는다. [본문으로]
  5. 아테네 민주주의 발전 과정에서, 바로 이러한 행동 때문에 페이시스트라토의 민주주의에 대한 공헌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의 과정에서 이토록 시원하게 토지개혁을 이룰 수 있는 이들은 사실 독재자 뿐이 없다. 토지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상, 시민 개개인의 역량을 바탕으로하는 민주주의는 성립되기 어렵다. 참 아이러니하다. [본문으로]
  6. 로마의 검투사와 전차 경기에서부터, 20세기 한국의 프로야구까지 그러한 예들은 많다. [본문으로]
  7. 자신의 돈으로 입장료뿐 아니라 일당까지 지급했다고 한다. 많은 이들이 비극 경연 대회에 참가하였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여기에서 보듯이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정권 유지에는 그의 재력이 큰 힘이 된다. [본문으로]
  8. 몇몇 강력한 외부 힘에 굴복하게 되는 경우를 제외하고 말이다. [본문으로]
  9. 경제적 박탈감이 심한 (경제적으로 궁핍한) 계층이 사회의 다수를 차지할 경우 민주주의가 제대로 운영되기는 어렵다. [본문으로]
  10. 민주주의는 국민 개개인의 교육 수준이 일정 이상이 되어야 비로소 원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여러가지 제약, 이를테면 경제적인 어려움, 매스미디어, 생각하는 교육이 아닌 시험을 위한 교육 등으로 국민 개개인이 민주주의를 할 만큼 교육되기는 어렵다. [본문으로]
  11. 어찌 본다면, 이런 생각에서 현재의 행태들이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역사가와의 대화라고 하지 않는가!! [본문으로]
Posted by so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