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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6.07 7세기 동아시아 외교관계를 통해 살펴본 신라의 삼국통일 4 by soul


Ⅰ. 書論

Ⅱ. 本論
 Ⅱ-1. 수(隋)제국의 등장과 고구려(高句麗)의 도전
 Ⅱ-2. 당태종(唐太宗)과 연개소문(淵蓋蘇文)의 대결
 Ⅱ-3. 7세기 신라(新羅)의 대외관계
 Ⅱ-4. 신라 동맹외교의 승리

Ⅲ. 結論


김 솔

Ⅰ. 서론


기원후 600년대의 시기는 어떠했을까? 당시의 시기는 우리 역사뿐 아니라 동아시아 역사에서 가장 큰 발자취를 남긴 시기라고 필자는 평가한다.

기원(紀元) 경에 각기 성립되어 발전하던 삼국(三國)[각주:1]은 4~6세기를 지나면서 두드러진 중앙집권체제(中央集權體制)로의 발전을 보인다. 이러한 중앙집권체제 아래에서 사적인 세력기반이 축소된 지배층은 중앙귀족으로 편제되고,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새로이 부를 축적한 세력이 성장하면서 중앙귀족의 수도 증가하였다.

이 과정에서 삼국의 지배세력은 빈번하게 대외전쟁을 일으키게 되고, 이에 따라 7세기에 들어서서 고구려(高句麗)ㆍ백제(百濟)ㆍ신라(新羅) 삼국 사이에 전쟁이 더욱 치열해지게 된다.

삼국간의 전쟁은 당시의 국제정세 속에서 동아시아 차원의 전쟁으로 확대된다. 신라가 한강유역을 점령한 후 고구려와 백제는 신라에 대한 공세를 가하기 시작했고, 고립된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압력에 대항하여 수(隋)[각주:2]ㆍ당(唐)[각주:3]과의 외교관계에 힘을 기울이게 된다. 당시 수ㆍ당은 중국을 통일하고 돌궐(突厥)[각주:4]과 고구려의 문제[각주:5]를 해결하고자 고구려를 침략하였는데, 고구려의 강력한 저항으로 실패하였던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라와 당은 서로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킨다.[각주:6]

이후 한반도 안에서는 신라가 남아 삼국의 문화를 융합ㆍ발전시키며 우리 역사의 중요한 이정표를 세웠으며, 동아시아 세계에서는 당을 중심으로 한 중화문화권(中華文化圈)[각주:7]이 탄생하게 된다. 이러한 높은 당의 문화는 일본에게 한국과의 관계를 통해 선진문물을 유입하는 것에서, 중국으로부터의 직접적인 문물 유입을 통한 독자적인 발전의 길을 걷게 한다. 또한 북방의 돌궐은 동ㆍ서로 분열되어 당의 영향력 아래 들어오게 된다.

이처럼 7세기에 한반도에서 일어났었던 삼국통일은 단지 한국사만의 문제에서 끝나지 않고, 동아시아 역사 전체에 크나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삼국의 통일은 급박한 동아시아의 국제관계 속에서 탄생한 산물이었으며, 스스로도 동아시아 세계에 큰 영향력을 준 사건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러한 이유로 본고에서는 삼국의 신라에 의한 통일의 이유를 당시의 국제관계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Ⅱ. 본론


Ⅱ-1. 수제국의 등장과 고구려의 도전


북조(北朝)국가인 수의 문제(文帝)[각주:8]는 588년 말 남조(南朝)국가인 진(陳)[각주:9]에 대한 원정을 행한다. 이로써 중국은 오랜 분열 끝에 다시금 통일되어 국력을 떨치게 되었지만, 반면 주변의 모든 국가들은 이와 같은 새로운 사태의 돌발에 크게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까지 동아시아세계에서 중국에 가장 위협적인 세력은 돌궐이었다. 투르크 계통의 돌궐은 552년 유연(柔然)[각주:10]을 타도한 이래 마침 동서로 갈라져 있던 북조를 압박하여 두 나라로부터 조공(朝貢)을 받고 있었다. 비록 서쪽의 북주(北周)[각주:11]가 576년 동쪽의 북제(北齊)[각주:12]를 멸망시켜 북조는 다시금 통일되었으나, 돌궐의 위세는 여전히 강성하였다. 그러나 581년 북주를 찬탈한 수의 문제는 이간책(離間策)을 써서 돌궐을 동서로 분열시키는데 성공한다.

한편 고구려의 평원왕(平原王)[각주:13]은 590년 장차 있을지도 모르는 수의 침략에 대비하여 병기를 수리하고 곡식을 저축하는 등 전쟁준비에 착수한다. 이때 고구려는 많은 재물을 들여 중국으로부터 노공(努工)을 몰래 초빙하기까지 하였다. 수의 문제도 이 같은 낌새를 눈치 채고 평원왕에게 국서(國書)를 보내어 고구려가 성의를 다하지 않는다고 불평을 늘어놓은 다음 “요하(遼河)가 넓다고 하지만 어찌 양자강(陽子江)에 비할 수 있으며, 고구려 인구가 많다고 한들 어찌 진(陳)나라에 비할 수 있으랴!” 라고 하면서 노골적으로 고구려를 위협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평원왕은 290년 죽고 태자인 영양왕(嬰陽王)[각주:14]이 즉위한다. 마침내 영양왕은 598년 수에 대한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고구려는 말갈 기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요하를 건너 요서지방을 공격했다. 수문제는 수륙 30만 대군으로 반격에 나섰으나, 육군은 요서지방으로 부대 이동 중 장마로 병참선이 끊어져 병사들은 굶주리고 더욱이 전염병이 돌아 전투력을 상실했고, 황해를 항해하던 수군 또한 태풍을 만나 고구려군과 싸워보지도 못한 채 이해 9월 철수하고 말았다. 이때 수군은 죽은 자가 10명중 8,9명이나 되었다고 하니 그 참상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수문제는 604년 죽을 때까지 고구려 침략을 단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문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양제(煬帝)[각주:15]는 주변국가의 군주들을 입조(入朝)시켜 중국 천자(天子)의 위업을 과시하는 일에 집착하며 고구려 사신에게 고구려왕의 입조할 것을 요구한다.

물론 고구려는 이를 거부하며 돌궐ㆍ왜국과의 동맹외교를 추진한다. 고구려-돌궐과의 동맹관계는 중국에 대한 일종의 포위망 구축을 의미했으며, 나아가 이 동맹은 왜국까지 확대될 개연성은 충분하였다.

또한 영양왕 당시 고구려와 왜국과의 관계가 전례 없이 긴밀했던 것은『일본사기(日本書記)』[각주:16]에 의하면 이 시기 고구려로부터 혜자(惠慈)[각주:17]등의 승려가 등이 도일하여 지도적인 업적을 남겼다. 특히 혜자대사는 595년 도일하여 615년 귀국할 때까지 꼭 20년간 체류하였는데, 고구려와 수의 관계가 절박했던 당시 왜국으로 하여금 중립을 지키게 할 외교전선을 편 것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다. 그가 일본에 있을 때인 607년 왜국은 수에 두 번째의 사신을 보낸다. 그런데 그 국서의 첫 머리에 “해뜨는 곳의 천자가 글을 해지는 곳의 천자께 드립니다. 이상 없습니다” 라고 하여 수양제를 격노하게 했다는 것은 예전부터 회자되는 일화인데, 이 같은 표현이 어쩌면 고구려의 수에 대한 적개심이 혜자대사를 통해서 표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 뒤 서역지방에 유목민족국가인 토욕혼(吐谷渾)[각주:18]이 동서의 교통을 위협하자 수양제는 중앙아시아지방에 사신을 보내 외국상인을 유치하는 한편 609년에는 스스로 토욕혼 원정에 나선다. 비록 이 원정은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으나, 그의 연지산(燕支山, 현재의 甘肅省지방) 南巡 때 고창국(高昌國)과 이오국(伊吾國)의 왕을 비롯하여 서역 27개국 사신들의 배알(拜謁)을 받은 것은 수의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 또한 그간 내란으로 피폐해지긴 했으나 신강성(新疆省) 서북경의 서돌궐 전 可汗 處羅[각주:19]가 611년 수천 명을 이끌고 와서 양제에게 배알한 것도 그즈음 높아진 권위를 말해준다.[각주:20] 이처럼 양제는 그 위세가 극에 달했던 611년 5월 마침내 고구려 침략을 위한 총동원령을 내린다. 이듬해 정월 113만 3800명에 달하는 대군이 막 개통된 대운하 영제거(永濟渠)[각주:21]로 탁군에 집결을 완료했다. 수의 대군이 요하를 건너 요동성(遼東城) 공격에 나섰다가 전선이 교착되자 30만 5000명의 별동대를 편성, 압록강을 건너 평양성을 향해 직진했다가 고구려군에 참패를 당한 것은 너무나 유명한 사실이다. 중국 측의 기록에는 이때 요동으로 돌아간 자가 겨우 2700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수양제는 이듬해 많은 공설(攻城)장비를 준비하여 2차 침략에 나섰으나 본국에 내란이 일어나자 철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614년 농민반란이 전국적으로 만연한 가운데 무리하게 3차 침략에 나섰다가 고구려가 유화책(宥和策)을 쓰자 대군을 돌이키고 말았다. 수가 고구려 침략에 잇따라 참패하고, 이로 말미암아 전국이 반란에 휩싸이자 지금까지 수에 복종해 왔던 동돌권이 마침내 등을 돌렸다. 啓民의 후계자인 始畢可汗은 615년 수양제가 장성 시찰에 나서 산서성(山西省) 북부 장성 가까운 곳에 이르렀을 때 돌연 10여만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기습 포위했다. 양제 일핸은 가까운 성으로 피신하여 농성에 들어갔다. 동돌궐은 양제를 구원하기 위해 대군이 오는 줄로 잘못 판단하여 포위를 풀고 가버려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했다. 하지만 양제는 618년 친위대 간부의 반역음모에 의해서 살해되고 말아 통일제국 수는 뜻밖의 단명에 그치고 만다.



Ⅱ-2. 당태종(唐太宗)과 연개소문(淵蓋蘇文)의 대결


수에 대신하여 618년 등장한 당은 호한(胡漢)이 혼합된 제국이었다. 그런 만큼 변경의 안녕을 꾀하려는 이이제이적(以夷制夷的) 정책[각주:22]을 기본으로 했다. 하지만 수말의 혼란을 틈타 이연(李淵)[각주:23]이 태원(太原)[각주:24]에서 거병할 때 돌궐과 결맹(結盟)하여 군웅(群雄)을 제압하려는 책략에서 동돌궐의 始畢可汗[각주:25]에게 칭신(稱臣)한 약점이 있어 당의 건국 초기부터 돌궐의 잦은 침략을 받게 되었다. 특히 625년 돌궐이 대거 쳐들어와 당군이 수도 장안(長安)에서 멀지 않은 태곡(太谷, 山西省 太原부근)에서 참패하자 고조는 천도하기도 한다. 또한 같은 시기에 오늘날의 청해성(靑海城) 일대에 반거하고 있던 토욕혼도 끊임없이 당의 영내로 침투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626년 고조의 차남 이세민(二世民)[각주:26]이 현무문의 변(玄武門之變)[각주:27]으로 황제에 즉위하면서 당은 대전환을 맞게 된다.

태종이 630년 동돌궐제국을 무너뜨린 뒤로부터 그 아들 고종(高宗) 때인 670년 설인귀(薛仁貴)[각주:28] 휘하의 당군 10만이 대비천(大非川, 靑海城 부근) 전투에서 토번(吐蕃)[각주:29]에게 괴멸적 타격을 입을 때까지의 40년간 당의 국세는 최고에 달하였다. 즉 630년 태종은 설연타의 협력을 얻어 동돌궐을 멸망시켰다. 마침 같은 해 서돌궐도 분열되어 이후 약화의 길을 걸었다. 이처럼 돌궐이 약해지자 그 대신 토욕혼과 설연타(薛延陀)[각주:30]가 일어났으나, 당군은 635년 토욕혼왕국을 철저히 정복하였고, 646년에는 돌궐 기병의 협력을 얻어 설연타왕국을 정복하였다. 한편 당군은 640년 8월 서쪽으로 7000여리 떨어진 서역 투르판분지의 고창국을 멸망, 그곳을 기반으로 하여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각주:31]를 설치했다.

이처럼 당제국은 세계제국을 자랑할 만큼 수많은 이민족을 상대하고 있었다. 당의 팽창 추세에 일대 쐐기를 박은 티베트 계통의 토번만 해도 당의 대군이 고구려 침략에 열중하고 있던 바로 그 시기에 토욕혼의 옛 땅을 취하면서 급속이 세력을 키웠다. 한편 668년에 고구려가 멸망된 후 바야흐로 신라와 당 사이에 전쟁이 열렸을 때 당이 신라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전력을 기울이지 못한 채 676년 끝내 철군하면서 평양에 있던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각주:32]를 만주의 요동성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던 까닭도 이 토번의 침략 위협이 절박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신라가 당과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종국에는 동맹관계였던 당을 상대로 하려 대전을 벌이게 되기까지의 삼국 관계의 추이와 이에 병행하여 이들 나라가 추진했던 대당 교섭의 경과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주지하듯 신라는 주로 그 입지조건으로 말미암아 삼국 중에서 국사 형성이 가장 늦었다. 더욱이 신라는 중앙집권국가를 향해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고구려의 군사적 도움을 받았고, 뒤에는 백제와 동맹하여 고구려의 남침에 공동으로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지만 6세기에 들어와 신라는 국가의 지배체제를 크게 정비하는 한편 영토 확장 전쟁에 착수하여 낙동강 유역의 여러 나라를 병합했고, 한강 상류에서 하류로 진출하여 한반도 중부지방을 차지하는 등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 이처럼 신라는 560년대에 이르러 백제를 제치고 고구려에 대항하는 등 삼국항쟁의 대열에서 단연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게 되었다. 다만 이로써 백제ㆍ고구려 양국을 상대로 전쟁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다행히 6세기 후반은 백제나 고구려 모두 국내 문제로 분망했으므로 이렇다 할 큰 침략전쟁은 없었다.

그러나 수가 중국을 통일하고 곧이어 598년 고구려에 대한 침략전쟁을 벌인 뒤부터 삼국간의 항쟁은 격화되어 간다. 600년 5월 즉위한 백제의 무왕(武王)[각주:33]은 수와의 외교교섭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무왕은 수양제가 장차 고구려를 칠 낌새를 눈치 채고 607년 수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 원정을 요청했다. 이에 수양제는 만족하여 무왕에게 고구려의 동정을 엿보도록 격려했다. 하지만 정작 수군이 요하를 건너자 무왕은 수를 돕는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신라 공격에 열을 올렸을 뿐이다. 이처럼 이해관계의 형평을 깊이 파악하지 못한 채 국가 간의 신의에도 충실치 못한 무왕의 이중적인 외교자세는 당이 건국된 후에도 되풀이 되었고, 그의 후계자인 의자왕(義慈王)[각주:34] 또한 변함이 없었다. 그 결과 백제는 끝내 당의 불신을 초래했을 뿐 아니라 고구려와도 관계를 개선할 기회를 포착하지 못했다. 백제는 오로지 바다 건너 왜국과의 전통적인 우호관계의 유지에 만족했을 따름이었다.


     당이 건국된 618년 고구려에서는 영양왕이 죽고 영류왕(榮留王)[각주:35]이 즉위했다. 고구려는 지난번 수와의 전쟁으로 지쳐 있었던 탓인지 당과 친선관계를 꾀했다. 고구려는 619년 이래 사신을 보내어 조공했고, 622년 당 고조가 중국 내의 고구려군 포로를 송환해 주는 조건으로 고구려 내의 중국인 포로를 돌려보내라고 요청했을 때는 이에 응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631년 당의 사신이 와서 지난번 수양제의 고구려 침략전쟁 때 죽은 중국 병사들의 유해를 파묻어 제사 지내는 한편 고구려가 전승을 기념을 만든 경관(京觀)[각주:36]을 헐어버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고구려는 즉각 장차의 전쟁에 대비하여 요동반도 남단의 비사성(卑沙城)[각주:37]으로부터 동북쪽으로 扶餘城(農安)에 이르는 1천여 리에 달하는 장성 축조에 착수한다. 이 공사는 16년 만에 완료되었다.

당은 640년 고창국을 멸망시킴으로써 고구려를 제외한 모든 적대세력을 정복했다. 당의 다음 공격목표가 고구려인 것은 명백해 보였다. 그러던 중 642년 10월 장성 축조공사를 책임지고 있던 연개소문(淵蓋蘇文)[각주:38]이 쿠데타를 일으켜 영류왕을 시해하고 정적 다수를 죽인 다음 국가의 대권을 장악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 직후 새로운 사태가 발생한 것을 계기로 태종은 마침내 침략전쟁을 결심하게 된다. 그것은 643년 9월 신라 사신이 와서 백제와 고구려가 연합하여 신라의 입공로를 막는다고 호소한데서 발단되었다. 그러자 당은 고구려왕에게 국서를 보내어 신라에 대한 공격을 중지할 것과 만약 다시 신라를 친다면 당나라 군대가 고구려를 칠 것이라고 위협했다. 이때 신라전선에서 돌아온 연개소문은 당의 사신을 만나 “지난날 수가 침공했을 때 신라가 빼앗아 간 고구려 땅 500 리를 돌려주지 않는 한 신라 공격을 중지할 수 없다”고 태종의 제의를 거부했다. 그 뒤 다른 사신이 평양에 와서 연개소문을 설득하려 하자 그는 사신을 토굴 속에 연금하기까지 했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태종은 전군에 동원 준비 명령을 내렸다. 반년 이상의 준비 끝에 645년 4월 요하를 건넌 당의 대군이 안시성(安市城)[각주:39]전투에서 교착되고 마침 동(冬)기가 다가오자 당태종이 참담한 모습으로 본국에 귀환한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태종은 그 뒤 647년과 648년에 군대를 보내 고구려를 쳤으나 번번히 실패했고, 649년 5월 보다 큰 규모의 침략군을 준비하다가 죽었다.



Ⅱ-3. 7세기 신라의 대외관계.


진흥왕(眞興王)[각주:40] 15년(554)의 관산성(管山城)전투[각주:41]는 신라-백제의 관계내지는 한반도의 세력판도에 커다란 전기를 가져왔다. 이 싸움은 나제동맹(羅濟同盟)[각주:42]을 파기시켰으며, 반대로 백제와 고구려는 급속히 가까워지게 되었다. 이 전쟁을 통해 신라는 한강유역을 차지하여 중국과의 직접적인 연결통로를 갖게 되었다. 이제 신라는 진(陳)ㆍ북제(北齊)ㆍ수(隋) 등과 직접 통할 수 있었고, 백제와 고구려를 차단하여 양국의 연결을 막을 수 있었다. 다만, 이러한 사태변화는 고구려-백제에게 위협을 초래함으로써 신라는 국가위기의 극복을 위한 외교적 성과를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진평왕(眞平王)[각주:43] 40년(618)에 당이 등장하였다. 이후 무왕(武王)에 이어 왕위에 즉위한 백제의 의자왕(義慈王)은 국내정치의 안정을 도모한 다음 신라에 대하여 적극 공세를 취하였다. 그는 642년 친히 군사를 이끌고 신라의 서쪽 변방 40여 성을 빼앗았으며, 8월에는 고구려와 함께 신라의 대당교통로인 당항성(黨項城:화성시)을 공격하였다. 또한 장군 윤충(允忠)으로 하여금 군사 1만으로 신라의 대야성(大耶城)[각주:44]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 선덕왕(善德王)[각주:45] 11년(642)의 대야성전투는 삼국간의 세력 판도를 급변시킨 대사건이었다. 이 전투는 신라와 백제간의 관계를 파국으로 유도하였으며, 김춘추(金春秋)[각주:46]는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고구려를 방문하였으나 실패하고, 당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


Ⅱ-4. 신라 동맹외교의 승리


신라는 643년 9월 당에 사신을 보내어 백제와 고구려가 연합하여 당항성(黨項城)[각주:47]으로 대규모로 침공할 듯하다고 하면서 구원병을 요청했다. 당시의 정황으로 볼 때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공동의 적이기는 했으나, 한편 양국이 연합군을 편성할 만큼 우호적인 관계도 아니었다.

645년 5월 당태종이 친히 대군을 이끌고 요하를 건너 고구려 영내로 쳐들어오자 신라는 이에 호응하여 3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 후방으로 쳐들어갔다. 하지만 당군이 9월 안시성 전투에서 패하여 고구려의 승리로 종결되자 신라의 위기는 다시금 고조되었다. 고구려의 대대적인 반격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백제는 신라군이 출동한 틈을 타서 신라의 서부 국경지대로 쳐들어가 7개성을 탈취한다.

이후 신라는 648년 세 차례나 당에 사신을 보냈는데, 이때 김춘추는 당태종과 단독 회견할 기회를 얻었다. 그는 태종에게 고구려 뿐 아니라 백제까지 멸망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당이 나선다면 이에 신라가 기꺼이 협력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당태종은 김춘추의 제안에 동의를 표했다. 이렇게 하여 이윽고 양국 간의 비밀 협상이 체결되었다. 이때까지 김춘추의 외교적 노력은 고구려ㆍ백제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지켜야 하겠다는 것뿐이었으나, 이 당과의 군사동맹을 계기고 하여 삼국통일의 전망을 갖게 되었다.

나ㆍ당동맹의 원칙은 649년 6월 당의 고종이 태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뒤에 한때 약화되는 듯했으나, 결코 폐기되지 않았다. 특히 654년 3월 김춘추가 즉위하면서 동맹을 구체화하기 위한 노력이 한층 더 강화되었다. 655년 정월 고구려는 말갈 기병부대를 앞세워 신라의 북쪽 경계로 쳐들어와 33개의 성을 함락했는데, 이에 무열왕은 강력히 당에 원병을 요청했다. 이로써 당은 648년 이후 중단됐던 고구려 침공을 재개했다. 당은 그 뒤 658년과 659년에도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659년 4월 백제가 신라 국경지대로 침범해온 것을 계기로 무열왕은 당에 사신을 보내어 백제에 대한 양면공격을 제안했다. 당은 대고구려 전략상 그 배후에 근거지를 확보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 마침내 대대적인 백제 침략전쟁을 결행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 이듬해 나ㆍ당 연합군에 의해서 백제가 멸망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백제멸망의 위기가 한창 고조되었을 때 고구려가 이를 방관하여 마침내 망국의 화근을 초래한 것만 보더라도 백제와 고구려가 끝내 군사동맹에까지 이르지 못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다만 백제와 우호관계를 유지해온 일본이 백제가 멸망된 뒤 그 부흥운동군을 돕기 위해 출병했다가 664년 8월 백강구(白江口)의 해상전투에서 2만 7천명의 대군이 나ㆍ당 엽합군에 참패하고 말았다. 나ㆍ당 연합군은 전승의 여세를 몰아 부흥운동군의 거점을 총공격하여 이를 함락시켰다.

무열왕은 661년 생을 마감하고, 태자이던 문무왕(文武王)[각주:48]이 왕위에 올라 삼국통일의 대업을 물려받았다. 문무왕은 즉위하자마자 군대를 동원하여 당과 함께 고구려 정복에 나섰다. 이윽고 연개소문이 665년 죽고, 그 세 아들 사이에 권력투쟁이 벌어져 고구려는 분열한다. 결국 고구려는 당의 침략군에 가세한 신라군에 의해서 평양성이 함락되어 668년 9월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Ⅲ. 결론


이와 같이 신라의 삼국통일은 단순히 혼자만의 힘으로 가능했던 것은 아니었으며, 그 의지 또한 확실치 않다. 7세기 동아시아의 대외적 틀 속에서 신라가 추구한 외교적 역량은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렇다고 신라 내부의 잠재력을 외면한 것은 아니다. 다만 3국이 처한 각각의 입장과 당나라와의 관계 및 당이 처한 시련 등을 함께 고려한 국제정세를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신라의 삼국통일은 국내ㆍ외의 정세가 결합되어 일어난 사건이다. 중국은 오랜 남북조의 분열을 극복한 수ㆍ당이 중국의 정통왕조로서의 권위를 과시할 필요성이 컸다. 그러나 수ㆍ당의 계속적인 고구려 침공이 실패함에 따라 당은 작전상의 변화를 꾀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여기에 신라의 적극적 친당정책이 주효할 수 있었다. 더구나 말갈ㆍ토번ㆍ설연타ㆍ토욕혼 등 빈번한 변환에 시달인 당으로서는 고구려ㆍ백제 정벌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케 했다.

또한 당시 삼국의 경우는 각각 한반도의 주인공을 자처하는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었다. 대당 강경책으로 한반도의 주인공을 자처한 고구려나, 해동의 강국을 자임한 백제의 경우가 그것이다. 한편 신라는 6세기 한강과 낙동강 유역을 확보함으로써 이룩된 경제적 기반과 정치ㆍ군사제도의 확립에서 오는 백성들의 공민화(公民化)에 따른 강력함이 가능하였다.

신라의 통일은 ‘영토축소와 외세이용’ 이라는 치명적 약점이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것이 지니는 한국사 전개과정에서의 의미는 과소평가 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하나의 주권 밑에 동일한 영토와 국민으로의 일원화’에 단초를 열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신라 통일의 한계와 문제점은 다음의 고려 통일이나 닥쳐올 민족의 통일에 큰 교훈이 된다는 것이다.





<참고문헌>


김기협,『밖에서 본 한국史』, 돌베개, 2008.

김정배,『한국고대사입문2』, 신서원,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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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高句麗, 百濟, 新羅. [본문으로]
  2. 581∼618. 양견(楊堅:文帝)이 581년 북주(北周)의 정제(靜帝)로부터 양위 받아 나라를 개창하고, 589년 남조(南朝)인 진(陳)을 멸망시켜 중국의 통일왕조를 이룩하였다. 문제·양제(煬帝:廣)·공제(恭帝:侑)의 3대 38년이라는 단명 왕조였으나, 남북으로 갈라져 있던 중국을 오랜만에 하나의 판도에 넣어 진(秦)·한(漢)의 고대 통일국가를 재현하였고, 뒤를 이은 당(唐)이 중국의 판도를 더욱 넓혀 대통일을 이룩하는 데 기반이 되었다는 점에서 존립의의가 크다. [본문으로]
  3. 618년 이연(李淵)이 건국하여 907년 애제(哀帝) 때 후량(後梁) 주전충(朱全忠)에게 멸망하기까지 290년간 20대의 황제에 의하여 통치되었다. 중국의 통일제국(統一帝國)으로는 한(漢)나라에 이어 제2의 최성기(最盛期)를 이루어, 당에서 발달한 문물(文物) 및 정비된 제도는 한국을 비롯하여 동(東)아시아 여러 나라에 많은 영향을 끼쳐 그 주변 민족이 정치 ·문화적으로 성장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한국의 경우 삼국체제(三國體制)가 붕괴되고 정치세력 판도가 크게 바뀌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본문으로]
  4. 6세기 중엽 알타이 산맥 부근에서 일어나 약 2세기 동안 몽골 고원에서 중앙아시아에 걸친 지역을 지배한 터키계 유목 민족. [본문으로]
  5. 중국 내를 통일한 수ㆍ당에게 있어 남은 직접적인 큰 위협은 돌궐과 고구려였다. 특히 이 둘이 동맹관계를 강화하는 것은 동아시아 지역의 힘의 역학관계가 긴장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는 것으로서, 수ㆍ당은 이 둘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중국의 역사에서 유목민족이 하나로 힘을 합치는 일은 언제나 안보의 가장 큰 문제였고, 강대한 유목민족이 동북지역의 실력자로 떠오른 고구려와 손을 잡는 것은 국가의 위기였다. [본문으로]
  6. 백제의 멸망 : 660, 고구려의 멸망 : 668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삼국의 통일이다. 그러나 백제와 고구려 멸망 이후의 역사적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당은 만주와 한반도를 자신의 지배적 위치아래 두기를 원했고, 신라는 이에 대항해 당과 전쟁을 벌여 당의 세력을 몰아낸다. 이 과정에서 신라는 고구려의 영역을 제외한 백제의 영역 정도만을 점유하는데 그치게 되었고, 이는 현재까지 신라의 삼국통일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삼국통일인지에 대한 논란의 씨앗이 되고 있다. 하지만 본고에서는 이러한 논란에 대한 언급은 피하고 결국 삼국 중에 신라가 살아남아 승자가 되었는지에 대해 서술하도록 하겠다. [본문으로]
  7. 한자를 사용하며 중국식 율령(律令) 등을 받아들여 각국의 사정에 맞게 사용. 이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 다양한 방면에서 동질성을 보이는 중화문화권의 국가로는 현재, 중국ㆍ한국ㆍ일본ㆍ베트남 이 있다. [본문으로]
  8. 수나라의 초대 황제(재위 581~604). 581년 수나라를 세웠다. ‘개황율령’을 제정, 과거제 등 중앙집권제를 강화했다. 당나라 율령의 기초를 세웠다. 589년 남조의 진을 평정, 남북조를 통일했다. [본문으로]
  9. 남조(南朝) 최후의 왕조(557∼589). 무장 진패선(陳覇先, 武帝:재위 557∼559)이 557년 양(梁)나라를 멸하고 건국하였다. 589년 수(隋)나라에게 멸망당하였다. [본문으로]
  10. 몽골 지방에 자리 잡고 살던 고대의 유목 민족. 중국 동진(東晉) 초기에, 선비족에 예속되었다가 5세기 초에는 그 옛 땅을 차지하였으며 돌궐에 멸망하였다. [본문으로]
  11. 우문호(宇文護)가 세운 중국 북조(北朝)의 왕조(557∼581). 서위(西魏)의 실권가인 우문태(宇文泰)가 죽고 아들 우문각(宇文覺)이 뒤를 이었을 때, 그를 보좌한 우문각의 사촌 우문호가 서위의 공제(恭帝)를 제위에서 밀어내고 이 왕조를 세웠다. 서위(西魏)시대부터 고대의 '주(周)'를 본받았기 때문에 명칭을 북주라 하였는데, 북위(北魏)의 효문제(孝文帝) 이래로 한화(漢化)주의·문벌(文閥)주의를 배척하고 북족존중(北族尊重)주의를 취하였으며, 소박(素朴)주의 정치를 지향하였다. [본문으로]
  12. 동위(東魏)의 실권자 고양(高洋:高歡의 아들)이 세운 중국의 왕조(550∼577). 남제(南齊)와 구별하여 북제라고 한다. 꼭두각시 황제인 효정제(孝靜帝)를 밀어내고 동위의 영토를 그대로 인수, 국호를 제(齊)라 하고 도읍을 업(鄴)에 정하였다. 경쟁국인 서위(西魏)·북주(北周)에 비하여 인재도 많았고 물자도 풍부하였지만, 결국은 북주에게 멸망되었다. [본문으로]
  13. 고구려 제25대 왕(재위 559∼590). 중국의 진(陳) ·수(隋) ·북제(北齊) ·후주(後周) 등 여러 나라와 수교하였다. 일찍이 장수왕(長壽王)이 평양의 북동쪽 대성산성(大城山城)으로 국도를 옮긴 뒤 양원왕이 장안성(長安城:평양)에 대규모의 축성 공사를 시작한 것을 완성시켜 장안성으로 천도하였다. [본문으로]
  14. 고구려 제26대 왕(재위 590∼618). 즉위 후 수(隋)나라와 화친을 꾀하다가 598년 말갈(靺鞨) 군사 1만을 이끌고 요서(遼西)를 선공(先攻), 전략적 요충 확보에 나섰다. 이에 수나라 문제(文帝)가 30만 대군으로 침공하였으나 이를 격퇴시키고, 600년 태학(太學)박사 이문진(李文眞)에게 명하여 《유기(留記)》 100권을 재편수, 《신집(新集)》 5권을 만들게 하였다. 608년 신라의 변경을 습격, 우명산성(牛鳴山城)을 함락하고 군사 8,000을 포로로 잡았다. 610년에는 일본에 승려 담징(曇徵)과 법정(法定) 등을 보내 종이, 먹 등의 기술을 전하였고 담징은 일본 호류사[法隆寺] 금당 내부의 벽화를 그렸다. 612년 수나라 양제(煬帝)가 문제의 패전을 설욕하고자 113만 수륙군(水陸軍)으로 쳐들어오자,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을 시켜 살수(薩水)에서 적을 섬멸하고 그 뒤에도 계속 침공군을 무찔러 수나라 멸망의 요인이 되게 하였다. [본문으로]
  15. 중국 수(隋)나라의 제2대 황제(재위 604∼618). 만리장성을 수축하고 대운하를 완성하였다. 3차례 고구려를 침입하였으나 대패하였고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나 수나라가 멸망에 이르게 하였다. [본문으로]
  16. 일본 나라[奈良]시대에 관찬(官撰)으로 이루어진 일본의 역사서. 680년경 착수, 720년에 완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일본 6국사(六國史) 중의 첫째로 꼽히는 정사(正史)로서 왕실을 중심으로 하여 순한문의 편년체(編年體)로 엮었으며, 편찬의 자료로는 제기(帝紀), 구사(舊辭), 제가(諸家)의 전승기록(傳承記錄), 정부의 공식기록, 개인의 수기(手記), 사원(寺院)의 내력 등을 기초로 하고, 특히 《백제기(百濟記)》 《백제본기(百濟本記)》 《백제신찬(百濟新撰)》 등 한국의 사료(史料)와 《위서(魏書)》 《진서(晉書)》 등 중국의 사서(史書)를 병용하고 있어, 일본에서 비교적 객관적으로 저술한 역사서라고 자부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 서술된 한국과의 관계는 왜곡된 부분이 많아, 진구황후[神功皇后]가 신라를 정복하였다는 터무니없는 대목이 있고, 또 연대(年代)도 백제의 기년(紀年)과는 약 120년의 차이가 있어, 이주갑인상(二周甲引上) 사실이 드러나 한국 학자 중에는 사서(史書)가 아니라 사서(詐書)라고 평하는 이도 있다. [본문으로]
  17. 고구려의 승려로 일본의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되었으며, 백제 승려인 혜총과 호코사[法興寺]에서 포교에 힘쓰다 615년 고구려로 돌아왔다. 《일본서기(日本書紀)》 등의 기록에 따르면, 혜자(惠慈)는 595년(영양왕 6년) 일본으로 건너가 최초의 여자 천황(天皇)인 스이코 천황(推古天皇)의 섭정(攝政)이었던 쇼토쿠[聖德, 574?~622]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그리고 쇼토쿠 태자가 중앙 집권 체제를 정비하고, 불교를 융성케 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본문으로]
  18. 선비족의 일부가 장성지대(長城地帶)로부터 이동하여 티베트계의 현지인을 제압하고 세운 나라로 왕을 가한(可汗)이라 일컬었고 가한 중심으로 유목생활을 하였다. 동시에 현지인 일부는 강가나 골짜기에서 농경생활을 영위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목되는 것은 이 나라가 동서간의 국제무역 중계를 생명으로 하는 상업도시의 성격을 강하게 나타낸 점인데, 그 때문에 서쪽 타림분지에는 이를 위한 기지가 설치되었고, 북방의 유목민 국가인 유연(柔然)이나 남방 티베트가 세운 여국(女國)과의 교섭도 활발하였으며, 동방으로는 중국의 북조(北朝)와 남조(南朝)와도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635년 당(唐)나라에 항복하여 예속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663년 티베트의 토번(吐蕃)에게 멸망당하였다. [본문으로]
  19. Chulo, 處羅(처라), 재위 619~621 [본문으로]
  20. http://blog.naver.com/maenam111?Redirect=Log&logNo=90043597423 (이해를 돕는 자료) 본래 본고를 처음 작성했을 때에는 없던 각주였으나, 블로그에 옮기는 과정에서 읽으면 도움이 될 것 같아 남깁니다. 인터넷이 갖는 장점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라 좋군요. 앞으로 좀 더 이런 방식을 고민하겠습니다. [본문으로]
  21. 중국 수나라 양제 때인 608년에 허베이지구[河北地區] 군사운수(軍事運輸)의 수로로 최초로 개통된 운하로 길이는 2,000km 정도이다. 송(宋)나라 때부터는 위허[御河]라고 불렀으나 명(明)나라 때부터 웨이허[衛河]라고 부른다. [본문으로]
  22. 以夷制夷 : 오랑캐로 오랑캐를 무찌른다는 뜻으로, 한 세력을 이용하여 다른 세력을 제어함을 이르는 말 [본문으로]
  23. 唐高祖. 당의 초대황제. [본문으로]
  24. 중국 산시성[山西省]의 성도(省都). 펀허강[汾河] 상류의 동쪽과 서쪽이 타이항[太行]산맥·뤼량[呂梁]산맥에 둘러싸인 분지에 위치한다. [본문으로]
  25. Sibir Khagan : 始畢可汗, 609∼619 [본문으로]
  26. 唐太宗. 당으 2대 황제. 중국 역대 황제 중 최고의 성군으로 불리어 청나라의 강희제와도 줄곧 비교된다. 그가 다스린 시대를 정관의 치라 했다. [본문으로]
  27. 626년 7월 2일에 발생한 당 고조 이연(李淵)의 후계자를 두고 장남 이건성(李建成)과 차남 이세민(李世民)의 다툼이다. 이에 승리한 차남 이세민이 제2대 황제인 당 태종으로 즉위하였다. [본문으로]
  28. 중국 당(唐)의 장군으로 고구려 정벌에 공을 세웠을 뿐 아니라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의 도호(都護)로서 한반도 침략 정책을 총지휘하였다. [본문으로]
  29. 7세기 초에서 9세기 중엽까지 활동한 티베트왕국 및 티베트인(人)에 대한 당(唐) ·송(宋)나라 때의 호칭. [본문으로]
  30. 수나라 때에 알타이산맥의 서남에 자리잡고 서돌궐(西突厥)에 복속되어 있었으나 605년에 다른 철륵 부족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켜 독립하였다. 약 10년 후에 다시 강성해진 서돌궐에게 복속되었으나 627년에 부족장 이남(夷男)이 부족을 이끌고 셀렝가강(江) 방면으로 이동하여 위구르와 결탁하고 동돌궐의 북변으로 침입하였다. 630년에는 당군(唐軍)과 협력하여 동돌궐을 와해시키고 몽골고원을 지배하였으나 이남이 죽은 뒤 분열하여 국세가 쇠퇴하였다. 646년 당군의 토벌로 멸망하여 당의 간접지배를 받았다. [본문으로]
  31. 중국 당(唐)나라 때 동(東)투르키스탄 및 그 서방의 무역로를 관할하기 위해 설치한 도호부. [본문으로]
  32. 고구려 멸망 후, 당(唐)나라가 고구려의 옛 땅에 둔 최고 군정기관(軍政機關). [본문으로]
  33. 백제 제30대 왕(재위 600∼641). 신라와 자주 충돌했고, 고구려 남진을 견제했다. 수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친당책을 썼다. 일본에 서적, 불교를 전달했다. [본문으로]
  34. 백제의 제31대 왕(재위 641∼660). 재위 초기에는 친히 신라를 공격하여 신라에 큰 타격을 주고 국위의 만회에 힘썼으나, 만년에는 사치와 향락에 빠져 나 ·당 연합군의 침공을 맞았으며, 끝내 항복하였다. [본문으로]
  35. 고구려의 제27대 왕(재위 618∼642). 동북쪽의 부여성으로부터 동남쪽 바다에 이르는 천리장성의 축조를 시작, 연개소문에게 역사(役事)의 감독을 맡겼으나 그의 반역으로 살해되었다. [본문으로]
  36. 고구려 때에, 전사자의 유해를 한곳에 모아 장사 지내고, 전공(戰功)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합동 무덤. [본문으로]
  37.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진저우[金州] 유이향[友誼鄕] 동쪽의 대흑산(大黑山)에 있는 고구려 때의 산성. [본문으로]
  38. 고구려 동부(東部) 출신이라고도 하며 서부(西部) 출신이라고도 하는데, 어느 쪽이 맞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름이 개소문(蓋蘇文), 개금(蓋金), 개금(盖金), 이리가수미(伊梨枷須彌) 등 기록마다 다양하게 표기되었으며, 성씨도 연(淵), 천(泉), 전(錢) 등으로 표기되었다. 본래 연씨이지만 당나라 고조(高祖) 이연(李淵)의 이름을 피해 뜻이 같은 천(泉)자로 바꿨다고 보는 것이 보통이다. 소문(蘇文)을 직명(職名)으로 보는 설, 연개(淵蓋)를 성으로 보는 설 등이 있지만 최근에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한편, 연개소문은 외교정책을 대당강경책(對唐强硬策)으로 이끌었다. 고구려는 수(隋)나라의 중국 통일 이후 침입에 대비하였다. 그리하여 영양왕 때에는 수나라가 침입하려 하자 오히려 먼저 공격하는 강경책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당나라가 건국한 뒤에는 영류왕 때 온건책을 펴고 있었다. 그런데 연개소문이 집권하면서 고구려의 외교정책이 강경책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변화를 신 구 귀족 사이의 갈등과 연관시키기도 한다. 흔히 구귀족은 대외 온건파, 신귀족은 대외 강경파로 보는데, 이들 중 누가 집권하느냐에 따라 대외 정책이 변한다는 것이다. 연개소문은 신귀족 세력으로 분류된다. [본문으로]
  39. 당시 인구가 10만 명 정도였던 고구려 영지로, 고구려가 요하(遼河)유역에 설치하였던 방어성들 가운데 전략적으로 요동성(遼東城) 다음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본문으로]
  40. 진흥왕 [眞興王, 534~576]. 신라 제24대 왕(재위 540∼576). 백제 점령하의 한강 유역 요지를 획득하고, 백제 성왕을 사로잡아 죽였다. 이어 대가야를 평정하고, 새로 개척한 땅에 순수비를 세웠다. 화랑제도를 창시하는 등 군사적 ·문화적으로 실력을 길러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았다. [본문으로]
  41. 관산성 전투는 554년 백제와 신라가 관산성(지금의 충북 옥천)에서 싸워 신라군이 백제군은 무찌르고 백제 성왕을 죽인 전투이다. 신라와 백제가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대항하여 동맹관계를 유지하다가 신라가 나제동맹을 깨고 백제의 영토인 한강유역을 점령하였다. 이것이 산성전투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554년(신라 진흥왕 15) 백제는 일본에 원군을 청하고, 대가야와 연합하여 신라의 관산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백제는 크게 패배하여 성왕(聖王)은 전사하였다. 관산성이 양군의 결전장이 된 것은 이 지역이 신라로서는 새로 점령한 한강하류지역을 연결시켜주는 전략적 요지이기 때문이다. 그뒤 양국관계는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적대관계가 계속되었다. 관산성의 위치는 백제 성왕사절지(聖王死節地)로 전해지는 충청북도 옥천군 군서면 월전리 9-3번지 부근과 이곳에서 맞은 편 서북쪽으로 약 800m 떨어져 있는 지역으로 추정하고 있다. [본문으로]
  42. 삼국시대에 신라와 백제가 고구려의 남진(南進)을 막기 위해 체결한 동맹. [본문으로]
  43. 진평왕 [眞平王, ?~632]. 진흥왕의 손자. 신라 제26대 왕(재위 579∼632). 여러 차례에 걸친 고구려의 침공에 대항, 수(隋)나라, 당(唐)나라와 수교하여 고구려의 침공을 꾀했다. 관청을 신설하고 내정의 충실을 도모하였으며, 불교를 진흥시켰다. [본문으로]
  44. 삼한(三韓)시대에는 변한(弁韓)에 속한 땅으로, 다라(多羅) ·초팔혜(草八兮) ·산반계(散半溪) 등의 부족국가들이 형성되었는데, 후에 대가야(大伽耶)에 흡수되었다. 신라의 장군 이사부(伊斯夫)가 562년(진흥왕 23)에 이 일대를 공략, 신라에 종속시키고 대량주(大良州)로 개칭하였다. 이 지역이 서쪽 백제와의 접속지로서 군사적 요충지였으므로, 신라는 이곳에 도독부(都督府)를 두고 경계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642년(선덕여왕 11) 백제 장군 윤충(允忠)의 침공으로 함락되었다. 이에 큰 타격을 입은 신라는 고구려에 원병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본문으로]
  45. 선덕여왕 [善德女王, ?~647]. 638년 10월에 고구려가 칠중성(七重城)을 공격해 오자 11월에 이를 격퇴하였으며, 642년에는 백제의 의자왕에게 미후성 등 40여 성을 빼앗겼다. 이어 백제가 고구려와 모의하여 당항성(唐項城)을 빼앗아 나당(羅唐)의 통로를 끊어버리자 여왕은 이 사실을 당나라에 호소하였으며 이어서 백제에게 대야성(大耶城)이 함락되자 김춘추(金春秋)를 고구려에 보내어 구원을 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643년에 다시 고구려 ·백제의 침입을 당나라에 호소하고 원군을 간청하였으며 이듬해 김유신(金庾信)으로 하여금 백제에게 빼앗긴 성을 회복하게 하였다. 645년에 당태종이 고구려에 원정하자 원군을 보냈으나 다시 백제에게 서변 7성을 빼앗겼으며, 647년에 비담(毗曇) ·염종(廉宗) 등이 여왕의 무능을 구실로 모반하였으나 곧 진압했지만 이 해에 여왕은 신병으로 죽어, 유언에 의해 낭산(狼山)에 장사지냈다. 여왕은 내정에서는 선정(善政)을 베풀어 민생을 향상시켰고 구휼사업에 힘썼으며 당나라의 문화를 수입하였다. 자장법사(慈藏法師)를 당에 보내어 불법을 수입하였으며, 첨성대(瞻星臺) ·황룡사 구층탑(皇龍寺九層塔)을 건립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본문으로]
  46. 후의 태종무열왕 [太宗武烈王, 604~661]. 신라 제29대 왕으로 김유신 등에게 5만의 군사를 주고 당나라 군사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당의 율령제도를 모방한 관료체계를 정비하고 구서당이라는 9개 군단(軍團)의 설치하는 등 왕권을 확립하였다. 642년(선덕여왕 11) 백제의 침입으로 대야성(大耶城)이 함락되고 사위인 성주(城主) 품석(品釋)이 죽음을 당하자, 고구려와 힘을 합하여 백제를 치고자 연개소문(淵蓋蘇文)을 만났으나, 국경의 영토문제로 감금당했다가 돌아왔다. 웅변에 능하고 외교적 수완이 뛰어나서 사신으로 일본과 당(唐)나라에 다녀왔으며, 특히 당나라에는 여러 차례 왕래하면서 외교적 성과를 거두고 군사원조까지 약속받아 삼국통일의 토대를 닦았다. [본문으로]
  47.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구봉산(九峰山) 위에 있는 삼국시대의 석축 산성. [본문으로]
  48. 신라의 제30대 왕(재위 661∼681). 태종무열왕의 맏아들. 나·당연합군으로 660년 백제,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676년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고 삼국통일을 완수했다. [본문으로]
Posted by so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