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09.07.11 Athenae (4) Chleisthenes의 개혁 (BC 508) by soul
  2. 2009.07.10 Athenae (3) Peisistratos의 참주 정치 1 by soul
  3. 2009.06.22 Athenae (2) Solon의 개혁 by soul
  4. 2009.06.13 Athenae (1) BC 7c 아테네의 귀족 사회 1 by soul


 이전 글에서 언급하였듯이 Peisistratos 사후, 혼란 상황에서 Sparta의 도움을 받아 Chleisthenes는 아테네의 정권을 잡는다.

* Chleisthenes의 개혁 (BC 508)

1. Ostracismos (도편추방제) 실시

 : 클레이스테네스 이전에 겪었던 참주 정치의 경험은, 참주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도편 추방제'의 실시로 이어진다.
 내용은 아테네 민회에서 독재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자의 이름을 도편(陶片)에 적는데, 이 때 6000표[각주:1] 이상을 받은 자는 국외로 10년 동안 추방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제도는 시간이 흐를수록 독재자를 예방한다는 순기능보다 정치판에서 정적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2. 행정 개혁 ('500인 위원회' 로의 개편)

 : 클레이스테네스는 당시까지 아테네에 남은 부족주의, 혈연주의, 파벌 간의 대립 관계를 타파하기 위한 행정 개혁을 단행한다.[각주:2] 

 우선 아테네 도시에 현존하는 지역이자, 파벌인, 도시 · 해안 · 산악 각각의 지역을 10개로 나누었다. 이 단위를 trittys라고 한다. 이렇게 하면 총 30개의 trittys가 만들어진다.(10 x 3 = 30)

 그리고 3개의 trittys를 합쳐서 하나의 phyle를 만드는데, 이 때 중요한 점은 각각의 세 지역에서 하나씩의 tritty를 합친다는 점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phyle는 총 10개가 된다. 이러한 phyle는 정치, 군사, 사회, 행정, 경제, 문화의 기본 단위가 된다. 각각의 지역에서 하나씩의 trittys를 합쳐 phyle를 만들면, 이들은 같은 phyle 안에서 거리는 멀지만 운명은 함께 하는 독특한 현상이 생긴다. 이로 인해 클레이스테네스는 부족주의와 혈연주의, 파벌 간의 대립을 타파하려 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만들어진 10개의 phyle에서는 각각 50명씩 선출하여 '500인 위원회'를 구성한다. 500인 위원회는 이전 솔론이 만들었던 400인 위원회와 마찬가지로, 민회에 의안을 상정할 권한을 갖는다. 이는 앞서의 솔론의 개혁에서와 마찬가지로 Areopagos의 권한을 축소하기 위한 방침이었다.

 한편, phyle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기본적인 군사 단위이기도 하였다. 각각의 phyle는 (일반적으로) 각각 보병 1000명, 기병 100명을 동원할 의무가 있었다. 또 각각의 phyle에는 한 명씩의 Strategos(장군)가 있었는데, 이들 총 10명의 Strategos는 하루마다 돌아가며 총사령관이 되었다고 한다.


*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은 아테네에서 민주주의가 비로소 정착되기 시작함을 의미한다. 클레이스테네스는 아테네에서 민주주의가 꽃 피울 수 있을 바닥을 다졌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결국 클레이스테네스 이후 페리클레스 시절에 아테네 민주주의는 활짝 꽃을 피운다. 한편, 다음 글에서 언급하겠지만,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대외적인 면에서 부정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민주주의 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클레이스테네스가 다진 기반 위에서 그 제도를 운영하는 사람들의 역량 만으로 민주주의가 가능할 지에 대한 의문이다. 앞에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그 민주주의에 참여하는 개개인의 자질에 상당 부분 기댈 수 밖에 없는데, 이것은 상당히 이루어지기 어려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 본 게시물을 동의 없이 이용할 시 책임이 따릅니다.
* 본 게시물은 학생 시절 필기 노트에 근거합니다.



  1. 6000표는 아마도 당시 민회에 일반적으로 참석할 만한 여건이 있는 사람들의 과반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본문으로]
  2. 20세기, 21세기 대한민국에 남아 있는 지역 갈등, 계파 갈등 등을 생각하면 민주주의를 위해 왜 클레이스테네스가 이러한 행정 개혁을 단행하였는지 이해하기 수월할 것이다. 부족, 혈연, 파벌이 남아 있으면 기득권의 힘은 여전할 수밖에 없다. 이는 진정한 민주주의로 보기 어렵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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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테네의 혼란 시기 (BC 591~560)

 : 일반적으로 'Archon이 없는 시대', 즉 Anarchia 라고 불린다.[각주:1]

 솔론의 개혁이 실패한 후 아테네는 평야파해안파가 대립하는 혼란시기가 찾아온다.

 토지귀족이고 Lycorgos와 Isagoras로 대표되는 이들이 평야파이며, 신흥 상공업자들이며 중산층을 대표하는 Megacles와 그의 아들 Chleisthenes[각주:2]가 속한 편이 해안파이다.

 이들의 대립 속에서 새로운 파벌이 등장하는데, 빈민 계층인 Thetes의 숫적 지지를 등에 업고 등장한 Peisistratos산악파가 그것이다.

 산악파의 등장으로 균형은 깨지고, 해안파와 산악파의 연합으로 아테네에서 평야파는 축출된다. 이후 해안파와 산악파는 다시 대립하게 되는데, 이때 승리한 것은 해안파였다. 이 때 페이시스트라토스도 아테네에서 쫓겨난다. (BC545)

 아테네에서 쫓겨난 페이시스트라토스는 그리스 북부의 마케도니아 지역에서 Pangaion 금광을 발견하고, 그 재력을 바탕으로 군대를 조직, 마라톤 평야에 상륙 후[각주:3] 아테네에 진격하여 BC545년에 메가클레스와 그의 아들 클레이스테네스를 축출한다.[각주:4] 이로써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참주정치는 시작된다.




* Peisistratos의 참주 정치

 1. 4신분인 Thetes의 숫적 지지를 기반으로 한 통치이다.

 이러한 이유로 페이시스트라토스는 테테스 계층을 위한 개혁을 시도한다. (장기 집권을 위함이다.)

2. 토지 분배 : 추방당한 평야파(토지 귀족)의 토지를 이용했다. 분배의 기준은 '추첨'과 '필요'였다. 추첨은 땅의 비옥도를 추첨한 것을 말하고, 필요는 예를 들어 부양 가족의 수와 같은 것들이었다. 이러한 토지 분배를 통해 페이시스트라토스는 테테스 계층의 계속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한편 토지세는 1/12에 불과했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재력이 충분하였다. 그는 자신의 재력을 이용해 아테네를 통치했다.[각주:5]

3. 비극 경연 대회 : 여느 독재자가 그러하듯이 페이시스트라토스 역시 일반 민중들의 관심을 정치로부터 돌리기 위해 오락을 제공했다.[각주:6] 이는 명백한 독재 유지책이었지만, 한편 이러한 페이시스트라토스의 공헌으로 그리스 비극의 수준은 높아져 1세기 후 아테네 문화 발전에 이바지한다.[각주:7]

4. 인질제도 : 독재를 유지하기 위해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정적의 친척을 인질로 잡아 두었다.

 

* Peisistratos 사후 그의 정권은 아들들에게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의 아들 둘의 이름은 각각 Hippias와 Hipparcus였는데, 큰 능력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히파르쿠스는 자신의 남자 애인에게 암살을 당하는데, 이는 질투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두 아들의 무능력을 틈타 스파르타로 망명해 있던 Chleisthenes가 망명지인 스파르타의 도움을 받아 아테네의 정권을 장악하고, 남아있던 Hippias를 쫓아낸다. 이를 통해 클레이스테네스의 민주정치 시기가 찾아온다. 힌퍈 쫓겨난 히피아스는 페르시아로 망명하는데, 이후 페르시아 전쟁이 일어났을 때 페르시아 편에 서서 아테네 침략에 도움을 준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참주 정치 기간은 독재 정치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물론 민주주의에 반대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테네는 필요악으로써 페이시스트라토스라는 강력한 독재자의 통치 기간 동안에 토지 분배를 이룬다. 또한 문화 발전에도 도움을 받는다. 둘 모두 후대 아테네의 전성기 시절, 민주주의를 이룩하는데, 또한 우리가 알고 있는 수준 높은 아테네 문화를 이룩하는데 높은 기여을 하였다. 특히 토지 분배의 경우에, 강력한 독재자가 아니라면 이런 정도의 개혁을 밀어 붙이기 어렵다. 우리는 역사에서 이러한 부의 분배를 위한 개혁이 기득권 세력에 막혀 좌절되는 경우를 수도 없이 지켜보았다.
 국가가 망하고 사라지는 이유는 대부분이 내적인 부의 불균형 현상이다.[각주:8] 어찌되었든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솔론이 하지 못했던, 클레이스테네스와 페리클레스가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던 정책을 훌륭하게 이루어 내었다. 그리고 아테네는 이를 통해 빈민을 구제하고 민주주의를 시도할 수 있게 된다.[각주:9]

 결국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어쨌든 아테네의 역사에 일정 부분 긍정적으로 작용하였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점이 있다. 난 민주주의가 이상적인 정치체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각주:10] 결국 중요한 것은 당시의 정치체제가 역사에 긍정적인 방향으로 전개되었는가, 그리고 당시의 일반인들의 삶은 어떠하였는가, 가 중요하다. 후자의 경우에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하겠지만, 전자의 경우에는 상당 부분 긍정적이다.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위기의 상황에 자신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국민들을 '이끌고 있다고' 생각 하고 계시는 분이 생각해 볼 대목이다.[각주:11] 긍정적인 결과라는 것이 무엇일지,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생각했던 운명 공동체가 누구였는지 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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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당신이 anarchism과 연관지어 생각 했다면, 정답이다!! [본문으로]
  2. 도편추방제로 유명한 클레이스테네스다. 클레이스테네스는 페이시스트라토의 참주정이 끝난 후 아테네 민주정치를 이끈 유명한 인물이다. [본문으로]
  3. 페르시아 전쟁 때 역시 페르시아는 마라톤 평야에 군대를 상륙시킨다. 이때 페르시아에 조언을 했던 인물이 후에 등장하는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아들인 히피아스이다. 아버지의 경험을 페르시아에 물려준 것으로 보면 된다. [본문으로]
  4. 메가클레스와 클레이스테네스는 스파르타로 망명한다. 이후 페이시스트랕토스가 죽고 아테네에 다시금 혼란이 왔을 때, 클레이스테네스는 스파르타의 도움으로 아테네의 정권을 잡는다. [본문으로]
  5. 아테네 민주주의 발전 과정에서, 바로 이러한 행동 때문에 페이시스트라토의 민주주의에 대한 공헌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의 과정에서 이토록 시원하게 토지개혁을 이룰 수 있는 이들은 사실 독재자 뿐이 없다. 토지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상, 시민 개개인의 역량을 바탕으로하는 민주주의는 성립되기 어렵다. 참 아이러니하다. [본문으로]
  6. 로마의 검투사와 전차 경기에서부터, 20세기 한국의 프로야구까지 그러한 예들은 많다. [본문으로]
  7. 자신의 돈으로 입장료뿐 아니라 일당까지 지급했다고 한다. 많은 이들이 비극 경연 대회에 참가하였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여기에서 보듯이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정권 유지에는 그의 재력이 큰 힘이 된다. [본문으로]
  8. 몇몇 강력한 외부 힘에 굴복하게 되는 경우를 제외하고 말이다. [본문으로]
  9. 경제적 박탈감이 심한 (경제적으로 궁핍한) 계층이 사회의 다수를 차지할 경우 민주주의가 제대로 운영되기는 어렵다. [본문으로]
  10. 민주주의는 국민 개개인의 교육 수준이 일정 이상이 되어야 비로소 원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여러가지 제약, 이를테면 경제적인 어려움, 매스미디어, 생각하는 교육이 아닌 시험을 위한 교육 등으로 국민 개개인이 민주주의를 할 만큼 교육되기는 어렵다. [본문으로]
  11. 어찌 본다면, 이런 생각에서 현재의 행태들이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역사가와의 대화라고 하지 않는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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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racon의 성문법 (BC 621)

 : BC 7c 후분부터 발생했던 Hektemoroi 계층은 아테네의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각주:1] 이러한 상황에서 드라콘의 입법이 이루어진다. 당시의 상황에서 우리가 눈여겨 볼 내용은 이 법이 "부채로 인한 자유의 상실"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이는 귀족들의 의견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아테네 최초의 성문법으로 귀족들의 자의적인 법률 해석의 남용을 방지하였다는 의미가 있다.


* Solon의 개혁[각주:2](BC 593~591)

기본적으로 아테네 사회를 자영농이 많은 건강한 사회로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개혁이 성공하려면 개인의 능력 뿐 아니라, 지지기반도 중요하다. 솔론의 개혁은 실패했지만, 민주주의의 첫 시도였다는 점에서 가치를 갖는다.
개혁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Seisactheia (부채 말소)

2. Timocracy (금권정치)

  : 결국 솔론은 하층민들이 더 이상 부채로 인해 자유가 상실되지 않기를 위해, 부채 말소를 추진한다. 우리가 솔론의 개혁에서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금권정치는 이러한 부채 말소에 대한 귀족들의 반대를 무마하려는 반대급부의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금권정치의 내용은 살펴보면,
  - 재산을 기준으로 시민들을 4개의 신분으로 나눈다.

1신분 : Pentacosiomedmnoi
2신분 : Hippeis
3신분 : zeugitai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기까지를 자영농을 보면 된다.
4신분 : Thetes (거의 대부분 hektemoroi이다.)[각주:3]

  - 위와 같이 재산에 따른 신분제도에 따라 정치적 권한이 달랐는데, 이를 금권정치라고 한다.
  
  - 4신분 까지는 모두 Ecclesia에 참여할 권리가 있었다.
  - 3신분 이상의 신분만이 '400인 위원회'에 참여할 수 있었다.
  - 2신분 이상의 신분만이 Archon과 Areopagos에 참여할 수 있었다.
  - 1신분만이 신관(명예직)이 될 수 있었다.


3. 행정 개혁 (400인 위원회)

  : 400인 위원회를 만들어 실질적인 행정 업무와 원로원의 민회 의안 상정 권한을 대신하게 하였다. 이는 귀족 원로원의 권한 축소를 노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400인 위원회는 혈연 중심의 부족제를 넘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었다.[각주:4]

  그리고

  아테네는 4개의 부족이 연합하여 이루어진 폴리스로,
  각각의 부족에서 3시분 이상의 시민 100명씩을 추첨으로 선출하여 400인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400인 위원회 중 각각의 100명에서 10명씩을 선거로 선출하였는데, 이를 40인 위원회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선출된 40명 중에서 9명의 Archon을 추첨으로 선출하였다.

  여기에서 눈여결 볼 점은 두번째 과정이다. 40인을 선출하는 과정에서 사용된 방법은 '선거'인데, 추첨과는 달리 선거에서는 1,2신분의 귀족들이 유리할 수 밖에 없다. 그 결과 정무관의 후보가 되는 40인에는 귀족들만이 남는 결과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 또한 솔론의 행정 개혁이 아테네 민주주의의 발전 과정에서 갖는 한계라고 할 수 있다.


  (결과)
  : 솔론의 개혁은 실패하였는데, 이는 하층민과 지배층 모두의 지지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층민의 입장에서 '부채 말소' 만으로는 다시 부채가 발생하는 필연적 귀결을 해결받을 수 없었다. 이는 위의 내용에서 살펴보듯이 토지 개혁과 토지 분배가 개혁과 함께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지배층의 입장에서도 Archon 9명을 장악하는 것은 기존의 지배 구조와 비교했을 때 큰 장점을 갖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특권이 부분적으로나마 사라진 것도 존재한다. 이와 같은 개혁 내용으로 솔론은 아테네 시민 계층 중 누구에게도 지지를 받기 어려웠다. 지지기반이 없는 개혁은 성공할 수 없다.

  어느 역사에서나 사회에서나 개혁이 요구될 때 이루어지지 못하면, 혼란이 찾아온다.
  솔론의 개혁이 실패한 후 아테네는 혼란과 내전에 휩싸이게 되고, 참주정의 시기가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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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ttp://soulation.tistory.com/50 [본문으로]
  2. 민주주의로의 첫 시도였으나, 실패하였다. 개혁을 추진하였던 솔론은 외국에서 돈을 번 인물로 아테네에 기반이 없었다. 이러한 배경은 개혁의 추진력이자 동시에 실패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본문으로]
  3. 당시 인구 비율을 보면, 1~2 신분을 합친 수가 약 500명 정도, 3신분이 9000명, 소작농인 4신분이 12000명 정도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4. 혈연 중심의 부족적 전통은 부족을 장악하고 있는 인물들(부족을 장악하고 있는 이들이 귀족이다.), 당시로서는 귀족들의 권력이 강함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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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henae (1) BC 7c 아테네의 귀족 사회.[각주:1]

1. 사회 신분 구조 : 아테네인들은 크게 자유민과 노예로 나눌 수 있다. 자유민은 또한 토지귀족인 Euphatridae와 자영농민인 Georgi, 그리고 상공업자인 Demiurgi 로 나눌 수 있다. 이들 자유민들은 민회인 Ecclesia에 참석할 권리가 있었다. 한편 위의 계층들 중 Demiurgi는 BC 7c 경부터 발달하던 상업활동에 따라 성장하던 새로운 계층이었다.

 위 내용을 간략히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아테네인 - 자유민 - Euphatridae : 토지귀족 (3명)
                            Georgi : 자영농민 (2명)
                            Demiurgi : 상공업자 (1명)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자유민은 민회 (Ecclesia)에 참석할 권리가 있었다.
              - 노예

        * 자유민 옆 괄호 안의 인원 수는 선출 가능한 Archon의 수이다. 아래에 더욱 자세한 설명이 있다.

2. 정치 구조

  2-1. Archon (정무관) : 총 6명으로 정책을 집행하는 역활을 담당하고 대외적으로 아테네를 대표한다. 6명의 정무관은 각기 계층에 숫자가 할당되어 있는데, 위 표와 같이 Euphatridae 계층에서 3명, Georg 계층에서 2명, Demiurgi 계층에서 1명이 선출될 수 있었다. Euphatridae 계층에서의 정무관 3명이 귀족의 힘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 정무관들은 각기 역활이 나누어져 있었는데, polemarchos 같은 정쟁 장관이 그 예이다. 정무관의 숫자는 후대 솔론의 개혁 이후에는 9명으로 증가한다.

  2-2. Ecclesia (민회) : 아테네의 자유민들이 모여 정책을 결정하던 회의이다. 이곳에서 결정된 정책은 Archon에 의해서 집행된다. 아테네 최고의 의사 결정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민회의 권한으로 대표적인 것이 전쟁과 평화의 결정시민 사형에 대한 결정이다. 하지만 정책 집행자들인 Archon들이 민회에 의안을 상정하지 않고 정책을 집행할 수 있었고, 귀족 연합체인 Areopagos(원로원)이 의안을 상정하지 않으면 민회는 열릴 수 없어 그 한계 또한 명확했다.

  2-3, Areopagos (원로원) : 'Areopagos' 의 뜻은 다리에서 밀어도 떨어지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만큼 사회적 지위가 확고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귀족들의 연합체로 민회에 의안을 상정하는 역활을 맡는다. 원로원에서 의안을 상정하지 않으면 민회는 열릴 수 없었다. 또한 시민에게 사형을 선도하는 권한이 있었다. 물론 시민 사형에 대한 결정은 민회에서 행해졌다.


3. BC 7c 후반의 변화 (결론)
  : 기원전 7세기 후반이 되면 Hektemoroi[각주:2] 라는 새로운 계층이 등장한다. 이들은 반 자유민인 소작농들로, 원래는 자유민이었으나 부채로 인해 토지귀족들에 의해 반자유민이 된 계층이다. Hektemoroi의 증가는 국방력과 재정의 약화라는 국가적 문제로 발전하여 아테네의 국력 약화로 이어진다. 이 문제 해결을 위한 충돌이 BC 7c 후반 이후에 아테네에서 계속되는 입법과 개혁이다. BC 621년 Dracon의 성문법을 시작으로 Solon의 개혁(BC 593~591), 아테네 혼란과 내전(BC 591~545), peisistratos의 참주정(BC 545~510), Chleisthenes의 개혁(BC 510~508), Pericles의 민주정치까지의 아테네 역사 진행 과정은 계속되는 사회 계층 간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변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과정을 거치면서 아테네는 그리스 세계의 강자로 군림하게 된다. 아테네는 대내적 개혁을 통해 안정을 찾고 대외적으로 뻗어 나갔지만, 대내적 안정의 완성은 대외적 팽창에서 왔고, 대외적 팽창이 극에 달했을 때에는 그로 인한 몰락을 경험한다. 이러한 아테네의 역사 변화는 현재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다. 이어지는 포스트에서 그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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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테네는 기원전 7세기 경부터 군주정에서 귀족정으로 그 정치형태가 변화한다. [본문으로]
  2. 1/6 이라는 뜻이다. 아마도 소작료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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