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가흥리 마애삼존불상, 암각화


김 솔


영주시(榮州市) 가흥리(可興里)에 위치한 마애삼존불상(磨崖三尊佛像)은 남동향하여 강변 암벽 한가운데에 새겨져 있다. 마애불의 왼편 벼랑에는 암각화(岩刻畵)가 새겨져 있어 주목된다. 암각화는 여덟 개의 방패 모양 혹은 칼 손잡이 모양인 검파식(劍把式) 형태로 배열되어 있다. 문양의 단출한 형태로 미루어볼 때, 제작 시기는 삼한 내지 삼국시대 초기로 추정된다. 또 암벽에는 구멍을 쫀 성혈(性穴)의 흔적도 뚜렷하게 남아있다. 경치 좋은 강변에서 어로와 수렵, 농경을 토대로 살았던 고대인들의 공동체적 신앙터였던 증거이다. 강변로가 나는 바람에 제단의 분위기는 깨졌지만, 암벽 앞에 서면 신성한 장소였음을 어렵지 않게 감지할 수 있다. 불교 정착 이후 암각화보다 신성(神性)이 강한 부처를 조성한 까닭인지, 암벽의 가장 높았던 바위에 마애불이 조각되어 있다. 마애불 앞의 비좁은 턱에는 건물 기둥을 세웠던 흔적들이 남아있다.

영주 가흥리 마애불상은 북방 고구려의 문화가 들어오는 길목인 죽령(竹嶺)으로 연결되는 교통로 상에 위치하여 그 중요성이 강조되는데, 본존상의 입체감과 좌우협시보살입상의 동적인 움직임 등은 삼국시대 신라 마애불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석조각의 새로운 활력을 느끼게 한다.



  영주 가흥리 마애삼존불상(榮州可興里磨崖三尊佛像)


   통일신라 7세기 후반, 보물 제221호, 본존 높이 3.2m, 좌협시보살상 2m, 우협시보살상 2.3m


통일신라로 들어오면서 불상조각은 입체감과 양감이 발달한 초당(初唐) 양식의 영향을 받아 점차 세련되어지기 시작한다. 삼국통일 시기에 활발한 대중교류를 통해 당의 문물이 수입되는 가운데 새로운 양식의 불상들이 많이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643년 당(唐)에서 귀국한 자장(慈藏)스님이 대장경과 불상 등을 가지고 왔는데, 이때 가져온 장경이 400여 함이라고 하니 불상 또한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초당 불상들은 통일시기 신라조각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고신라 불상들의 양식에서 변화하는 과도기의 영주 가흥리 마애삼존불상은 이 시기의 불상으로 추정된다.


삼존불상은 고부조로 조각되어 원각상에 가까운 입체감과 양감을 보인다. 본존상의 머리는 민머리이고, 얼굴은 둥글고 살이 많아 뺨이 팽팽하며, 가볍게 다문 입가는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대의는 양 어깨를 가리도록 통견(通肩)식[각주:1]으로 입었고, 어깨와 가슴 위로는 옷주름이 묵직하게 흘러 친의 두꺼운 질감을 잘 나타내고 있다. 두 손으로 짓고 있는 시무외인[각주:2]ㆍ여원인[각주:3]의 수인이 매우 자연스럽다. 연꽃으로 장식된 두광 안에는 세 화불이 떠 있고, 두광 밖으로는 화염문 방식이 간결하다. 본존의 앉은 자리를 감싼 대좌의 연잎이 큼지막하고 시원스럽게 피어올라 있다. 눈이 손상되지 않은 상태였다면, 둥실하게 살이 오른 동안(童顔)의 표정이 좋았을 것이다. 이는 고신라 불상들에서 볼 수 있는 양식적 특징으로, 신라 통일 직후의 조각미를 보여준다.

좌협시보살상은 두 손을 올려 천의를 쥐고 있는데 비록 눈은 손상되었으나 귀여운 아기 같은 얼굴 모습은 그대로 남아 있다. 또한 이 보살상은 약간의 움직임이 표현된 몸체를 본존상 쪽으로 살짝 기울이고 있는데, 이는 당 양식의 영향이라고 생각된다. 몸의 앞부분은 7세기 전반부터 신라 지역에서 크게 유행했던 2단 천의 형식을 보여준다. 반대편의 우협시보살입상은 갸름하고 예쁜 얼굴에 입술이 섬세하게 조각되었으며 두 손을 들어 합장한 채로 서있다. 한편 2003년 여름에 내린 폭우로 삼존불 앞쪽의 바위가 갈라지면서 한 구의 마애불좌상이 더 발견되었다.

이 마애불은 통일신라시대의 조각 흐름을 잘 보여주는 사실주의적 불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김덕삼이라는 부자가 자식을 얻으려고 원불(願佛)로 조성했다는 전설도 전한다.


사진 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 http://www.cha.go.kr/



영주 가흥리 암각화(榮州可興里岩刻畵)


    경북유형문화재 제248호


우리나라 마애불의 시원으로서, 무교적 바위 신양에서 불교로 변화된 증거가 같은 공간에 남아있는 사례로 영주 가흥동의 마애삼존불과 암각화를 들 수 있다. 영주는 신라의 북쪽이자 고구려와 인접했던 지역으로, 낙동강 상류의 너른 강변과 소백산맥이 병풍처럼 펼쳐진 공간에 마애불과 암각화가 위치해 있다. 암각화는 여덟 개의 방패 모양 혹은 칼 손잡이 모양인 검파식(劍把式)형태의 이방연속무늬[각주:4]로 배열되어 있다. 선을 쪼아서 굵은 선으로 표현하는 수법을 사용하였고, 암벽에는 구멍을 쫀 성혈의 흔적도 뚜렷하게 남아있다. 이는 고령 양전동 암각화와 울산 천전리 암각화에서 볼 수 있는 수법이다. 암각화의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문양의 단촐한 형태로 미루어볼 때 제작 시기는 삼한시대나 삼국시대초기로 추정된다. 아마도 이곳은 경치 좋은 강변에서 어로와 수렵 그리고 농경을 토대로 살았던 고대인들의 공동 신앙터였을 것이다. 현재는 강변로가 나는 바람에 제단의 분위기는 깨져 있지만, 암각화의 위치에서면 신성한 장소였음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그런 곳이기에 불교가 정착된 뒤로는 암각화보다 신성(神性)이 강한 마애삼존불을 조성했을 것이다.




   한국 마애불 변천 양식


마애불은 벼랑의 바위에 새겨놓은 불상을 말하는데, 마암불(磨岩佛)이라 부르기도 했다. 땅과 한몸을 이룬 암벽에 조각해 놓았기 때문에 마애불은 그것을 조성한 당대 사람들의 심성과 미의식은 물론 부처를 새기기 위해 선택한 바위의 지형적 특성을 생생히 파악하게 해준다. 그리고 조성 당시부터 현재까지 이어온, 무불(巫佛)이 혼재된 신앙 형태가 뚜렷이 남아 있는 편이다.[각주:5]

따라서 마애불은 어느 문화유산보다 가연과 종교와 예술, 그리고 삶의 흔적이 함께 어우러진 공간을 연출하고 있다. 우리 불교 미술사에서 마애불은 자연에 거스름 없이 신앙과 예술을 조화시켜낸 한국문화의 특성이 가장 뚜렷하게 반영된 유산으로 꼽을 만하다.

이러한 마애불은 600년을 전후한 백제의 서산 마애삼존불에서 시작하여 구한말 서울주변의 마애불까지 1300년 동안 꾸준히, 그리고 200여 곳이 넘는 전국에 걸쳐 조성되어 왔다.

 한국의 불교미술사에서 마애불이 발생한 시기는 600년 전후로 추정된다. 충남 서해안 지역인 서산과 태안반도에 조성된 마애불을 시발로 잡는데 이는 백제의 공주시대 이후 바다를 통해 중국과 교역하였던 요지였기 때문이다. 한국 마애불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서산 마애삼존불이 보여주듯이 한국의 마애불은 암벽의 형태와 바위의 결을 최대한 살린 뛰어난 조각미를 창출하였다.

불국토 건설을 꿈꾸던 신라인의 이상미가 반영된 8세기 신라의 마애불은 부처의 육신을 탄력 있게 잘 살린 부조예술의 뛰어난 기량을 뽐냈으나 이 또한 바위의 원형을 최대한 살리려는 배려를 잊지 않고 있다. 주로 당시의 수도였던 경주 주변에 조성되어 있으며 이상화된 종교의식과 최고의 조각미가 완벽하게 결합하여 불교미술의 절정을 이루었던 시점과 때를 같이한다.

신라 후기 지방 호족 세력의 성장과 함께 마애불의 조성이 확산되면서, 그 호족의 미의식이 실린 9세기 마애불부터는 절대적 존재로서의 이상화된 부처의 정형이 깨지고 조각수법이 다양해졌다. 표정은 딱딱해졌지만 바위에 새긴 변상도나 불화 같은 이미지의 선각형 마애불이 출현하였고, 안면은 부조로 조각하면서 몸은 선묘로 새기는 독특한 형식도 창출되었다.

마애불이 가장 많이 조성된 전성기인 고려에 들어서서는 신라 말의 사회적 전통을 배경으로 한 마애불이 가장 유행하였다. 지방 호족의 후원 아래 조성되면서도 민중의 감성과 함께하는 마애불들이 경기ㆍ충청ㆍ전라도 지방 곳곳에 들어섰다. 고려시대 이후 괴력을 갖춘 신이적인 존재로서의 돌부처, 곧 토속미 가득한 마애불 조각에는 부처의 도상적 격식보다 기복신앙의 의미가 강조되어 있는데 이는 ‘괴체의 미학’을 구현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고려시대이후 사대부 문인 문화의 융성과 함께 정치이념이 유교로 바뀌게 되면서 조선시대에는 수도인 한성주변을 제외하고선 마애불의 조성이 급격히 줄어들게 된다. 그러나 마애불을 새긴 암벽이나 바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변형하지 않았다는 점은 우리 마애불의 변함없는 특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암각화 변천 양식


옛 사람들은 바위가 자신들의 간절한 염원을 들어주는 영원의 매개체라 믿었다. 또한 그림 자체가 사람들의 바람을 재현하고 있었고, 주술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주술적인 마력이 있는 돌에 주술적인 수단이자 삶의 목표를 그림으로 그렸다는 것은 바로 신앙적인 사고의 표출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성소에 있는 돌에 자신들의 바람을 표현하기 위해 또 그 바람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간절한 마음을 모아 암각화를 제작하였던 것이다.

암각화의 그림을 새기는 작업은 신으로부터 특별한 능력을 부여받은 샤먼이나 제사장만이 할 수 있었으며 특별한 장소에 있는 바위를 선택하여 대부분 동남쪽이나 남쪽을 향하게 하여 그림을 새겼다. 돌에 새겨진 그림들은 형태에 따라 세 가지로 분류 되는데 사물의 형상을 사실대로 표현한 물상(物象)문양과 동그라미ㆍ겹 동그라미ㆍ세모ㆍ마름모 등과 같은 기하학문양, 그리고 신상(神像을) 새긴 문양이 있다. 대부분의 암각화 유적지는 강가의 바위 절벽이나 강과 인접한 곳에 있거나, 산으로 둘러싸인 봉우리에 있다.

우리나라의 암각화들은 대부분 신석기시대 후기부터 초기 철기시대에 속하는 유적들이다. 1970년 12월 25일 울산 천전리 암각화가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으며, 이듬해 고령 양전동과 울산 대곡리 반구대의 암각화가 발견되면서 지금까지 10여곳 이상에서 암각화가 확인되었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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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은, 『석불 돌에 새긴 정토의 꿈』, 한길아트, 2003.

최성은, 『KOREAN Art Book』석불ㆍ마애불 편, 예경, 2004.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엮음,『답사여행의 길잡이』경북 편, 돌배게, 1995.


박정근,「한국의 암각화 연구 성과와 문제점」, 한국고대학회, 선사와 고대 제15호, 2000.

이성도,「백제ㆍ신라 마애불의 조형성 연구」, 한국미술교육학회, 미술교육논총 美論20券, 2006.

장두영,「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마애불 연구」, 한남대 대학원, 2003.

문화재청 홈페이지 : http://www.ch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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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불상이나 승려의 옷 모양새 가운데 양 어깨를 모두 덮은 경우를 이른다. 통양견(通兩肩)·통양견법 또는 통피(通披)라고도 한다. ‘양 어깨를 통하여 나타난다’는 뜻이다. 여기서 나타난다는 것은 복전(福田)이 나타난다는 뜻인데, 이는 공경을 나타내는 편단우견(偏袒右肩)과 대치된다. 비구가 거리에 나가 걸식할 때는 통견을 하는 것이 원칙이다. [본문으로]
  2. 施無畏印: 이포외인(離怖畏印)이라고도 한다. 말 그대로 중생에게 무외(無畏)를 베풀어 공포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우환과 고난을 해소시키는 대자의 덕을 보이는 인상이다. 나를 믿으면 두려움이 없어진다는 뜻이다. 여원인(與願印)과 함께 한국 삼국 시대의 불상에서 그 종류와 관계없이 모두 취하고 있는 인상이다. 그래서 이 둘을 통인(通印)이라 한다. 여원인과 마찬가지로 부처님이 이 수인을 한 때와 장소가 뚜렷하지 않기 때문에 불상이 이 수인을 하였다고 해서 그것이 어떤 장소, 어떤 의미를 나타낸 것인지 확실치 않다. [본문으로]
  3. 오른손을 어깨높이로 올리고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는 시무외인과 반대되는 형상인데, 대개 오른손은 시무외인을, 왼손은 여원인을 하는 경우가 많다. [본문으로]
  4. 양쪽 또는 아래위로 연결되어 두 방향으로 전개되는 연속무늬 형식. [본문으로]
  5. 마애불은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의 산악숭배, 암각화, 거석문화 등 선사시대부터 형성된 무교적 신앙형태와 결합하면서 발전하였다. [본문으로]
Posted by so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