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on battista Alberti, 1404 - 1472.

: <회화에 대하여> 라는 책에서 고대 그리스 · 로마를 기반 삼아 수정 · 보완을 통해 '인체비례'와 '투시원근법'을 설명하였다.[각주:1]




1) San Andrea of Mantua.
 - Leon Battista Alberti.

: Facade(파싸드)[각주:2]를 보면 기둥(벽기둥)이 있고, 그 위에 pediment(페디먼트)[각주:3]가 올려져 있어 마치 그리스 시대의 신전 건축과 같은 느낌을 준다.[각주:4] 또한 내부의 천장 부분에는 로마 시대의 기법인 'tunnel vault'가 사용되었다. 이렇게 그리스 · 로마의 컨셉을 기독교 교회에 사용한 것은 당시로서는 큰 변화였다.
 
 이러한 그리스 · 로마적인 취향을 기독교 교회에 사용하는 변화와, 앞에서 설명하였듯 르네상스 특유의 규칙성을 보이는 전면의 3등분은 르네상스 건물로의 변화라 말할 수 있다.

기둥의 종류





2) Palazzo Rucellai[각주:5], facade.
 - Leon Battista Alberti.

: 기존에 6개였던 집을 하나의 집처럼 보이도록 리모델링한 것이다.
 건물의 전면에 하나의 단위를 이용해 규칙성있게 표현함으로써 이러한 효과를 내었는데, 물론 건물의 내부는 서로 독립된 다른 집들이다. 이러한 규칙성이 있기 때문에 다소 심심해 보이는 전면이지만, 뛰어난 건축으로 꼽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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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게시물은 학생 시절 필기 노트에 근거합니다.




  1. "금색을 칠하고 싶으면 노란색을 가지고 해야지 '금'을 칠하는 것은 질이 낮은 것이다." 라는 말을 했는데, 이는 회화에서의 값어치가 '재료'에서 '기술'로 변화해가는 당대의 분위기를 설명한다. [본문으로]
  2. 교회 건물의 정면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위 사진에서 보이는 부분이다. [본문으로]
  3. 전면 위쪽의 삼각형 부분이 페디먼트라고 보면 된다. [본문으로]
  4. 기둥이 있고 그 위에 페디먼트가 올려져 있는 형태는 일반적인 그리스 건축의 형태이다. [본문으로]
  5. 팔라초는 팰리스를 뜻하고, 루첼라이는 건물 주인의 이름을 뜻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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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ippo Brunelleschi, 1377~1446. (브루넬레스키)




1) Cathedral[각주:1] of Firenze[각주:2]
   -  Dome designed by Brunelleschi

: 르네상스의 교회는 과거의 것(중세)을 당시의 취향에 맞게 개조한 것이다.
 이 교회는 돔만 르네상스 구조인데, 돔은 아치의 응용으로 로마인들의 건축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로 돔을 르네상스[각주:3] 요소라고 한다. 이 교회의 돔은 8각 모양으로 공학적으로도 뛰어난 테크닉을 보여준다.
 이러한 교회의 재건축은 당시 부를 축적한 피렌체시의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이루어졌다.




2) San Lorenzo 교회, Firenze.
  -  Renovated by Brunelleschi.

: 기본적으로는 중세 바실리카 형식[각주:4]이지만, 브루넬레스키가 르네상스에 맞게 개조하였다. nave 좌우에 기둥이 있고 그곳에 채플을 넣었다. transept 좌우에는 각각 old와 new sacristy가 있다. 또한 nave 좌우 기둥을 얇게 바꾸고 기둥 위 아치를 높게 올렸다. 기둥 위 한단을 더 올려 시작되는 아치는 중세의 뾰족한 형태를 벗어나 르네상스 특유의 둥근 아치 형태를 보여준다. 중세 교회의 두꺼운 기둥과 뾰족한 아치가 변화한 것이다.
 그리고 천장에는 중세적인 볼트 형태가 아니라 로마 시대의 □형 타일식 천장을 사용하였다. 브루넬레스키가 자주 사용한 갈색의 짙은 돌은 아마도 르네상스의 수학적 구조를 보여주려는 이유였을 것이다.
 브루넬레스키 리모델링의 핵심은 공간을 넓히고 기둥을 재배열 하는 것이었다. 이는 중세에 비해 높이는 낮지만 공학적으로 더욱 뛰어나게 실내를 가꾸는데 신경을 쓰고, 고전 시대(classical period)의 기둥을 이용하여 미감(美感)에 더욱 신경을 쓰려는 르네상스적 특징을 보여준다.





3) Pazzi Chapel, Firenze.
  - Brunelleschi.

: 이전 시기의 교회보다는 단순하고 심심해 보이지만, 르네상스 건축의 미학인 규격성을 잘 보여주는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정사각형 모양의 한 단위를 기본으로 완벽하게 규격에 맞아 떨어지기 때문에[각주:5] 장식이 들어갈 틈이 없는 것이다. 아주 수학적이고 규칙적인 이 건물이야말로 르네상스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4) Hospital of the Innocents, Firenze.
  - Brunelleschi.

: 최초의 고아원이라고 할 수 있다. The Innocents는 예수가 태어났을 때 헤롯에 의해 죽은 예수 이외의 유대 아이들을 뜻하는데, 이로 인해 어린 아이들의 모습이 건물에 붙여져있다.
 기존의 존재했던 건물을 브루넬레스키가 르네상스 특유의 규칙성을 이용하여 리모델링 하였는데, 건물 외면에서 이를 잘 살펴볼 수 있다. 바깥쪽 기둥이 위의 아치를 이루는 원의 지름이 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기둥의 안쪽의 '구'로 이루어진 아치도 그 기둥의 길이가 지름이 되는 매우 수학적인 규칙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규칙성은 당대에는 놀랍고 우아하며 리듬이 느껴지는 그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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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ttp://soulation.tistory.com/47 의 각주1을 참고. [본문으로]
  2. 영어로는 플로렌(Florence)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3. 르네상스는 고대(그리스와 로마)를 되살린다는 것이다. 르네상스에 대한 이야기는 앞으로 전개될 서양사 부분에서 자세하게 다루겠다. [본문으로]
  4. 중세로부터 내려오는 교회의 라틴십자가 형식을 말한다. 즉, 기다란 세로축에 이것보다 짧은 가로축이 교차하는 형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본문으로]
  5. 도면에서 가상의 사각형을 그려 보아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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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ena Chapel


1)  Interior of Arena Chapel[각주:1]
   - Fresco by Giotto, 14c.

: (이탈리아 Padua (Padova)에 위치하고 있다. 'Cappella Scrovegni' 라고도 한다.)
 천장에 파란 바탕을 칠하고 금색별을 그려 넣었다. 그리고 양쪽 벽에는 프레스코로 예수의 일생이 그려져 있고, 문이 있는 벽 쪽에는 최후의 심판이 그려져 있다.

아래의 그림은 Arena Chapel의 내부 그림 중 한 부분이다.




2) Lamentation (통곡)
  - Giotto 作, Arena Chapel, 14c.

: 십자가에서 내린 예수를 두고 비탄에 빠진 장면을 그렸다.
 완전히 등을 돌리고 있는 두 인물이 있다. 이는 중세 도상에서는 볼 수 없는 인문 표현이다. 또한 음영을 이용한 3차원적 모습도 있다.
 이 그림에서 나타나는 큰 특징은 가장 중요한 장면인 예수의 얼굴과 성모의 표정이 나타나는 부분이 그림 중심이 아니라 외쪽 하단에 치우쳐 있다는 점이다. 이에따라 자연스럽게 보는 이의 시선이 이동되도록 산등성이와 사도 요한[각주:2]을 이용하였는데, 이는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놀라운 시도이다. 이것이 후대 '투시원근법'[각주:3]으로 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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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hapel'은 작은 규모의 교회나, 교회 안의 작은 예배실을 가리킨다. 한편 church는 일반적인 교회나 성당을, cathedral은 중심이 되는 대성당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2. 가운데 붉은 옷을 입고, 상체를 기울이고 젊은이가 사도 요한이다. [본문으로]
  3. 투시원근법은 대표적인 르네상스적 요소이다. 투시원근법은 자연을 더이상 신의 관점이 아닌 인간의 관점으로 바라보았음을 나타낸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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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donna



1) Rucellai Madonna
  - Duccio 作, 14c.

: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옥좌에 앉아있다. 중세적인 미술이지만, 무릎의 양감 등에서 르네상스를 예견할 수 있다.




2) Ognisanti Madonna
  - Giotto 作, 14c.

: 두치오의 '루첼라이 마돈나'에 비해 몸과 공간에서 르네상스로의 변화가 두드러진다.
 우선 마리아의 모습을 보면, 앉아있는 모습이 비교적 분명하고, 옷의 주름이 더욱 자연스러우며, 몸의 굴곡가슴 부분의 양감에 의해 잘 드러나 옷 속의 몸 덩어리가 느껴진다. 빛과 그림자에 의한 음영표현도 볼 수 있다.
 또한 천사들이 어디에, 그리고 어떻게 서 있는지가 분명하고, 앞 사람에 의해 뒷 사람의 얼굴이 가려지는 장면을 통해서는 공간의 논리가 보다 중요하게 표현되었음을 느낄 수 있다.[각주:1]
 이러한 면들은 분명 르네상스의 태동과 맥락을 함께 하지만 몸의 양감을 드러내려는 노력에서 아직 부자연스러운 기하학적 표현 또한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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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러한 면들은 모두 중세의 미술과는 차이를 보이는 것들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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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배리석불입상(慶州拜里石佛立像)
보물 제63호

김 솔


 포석정(鮑石亭)에서 삼릉(三陵)입구 사이에 삼불사(三佛寺)라는  절이 있는데 이곳이 선방골(禪房谷)이다. 이 골짜기는 서남산 골짜기 중에서 계곡의 길이가 짧은 곳 가운데 하나이지만 삼체석불입상(三體石佛立像)이 있어서 많이 알려진 곳이다. 삼체석불입상이 자리잡고 있는 제1사지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 탑지명에 의하면 선방사(禪房寺)가 있었음을 알 수 있고, 동시에 선방곡(禪房谷)이라는 계곡의 이름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조사된 사지(寺址)는 3개소이고 불상(佛像)은 삼체석불 이외에 석조보살입상(石造菩薩立像)과 최근에 발견된 선각여래입상(線刻如來立像)이 자리하고 있다.


삼존석불(三尊石佛)

 지금은 10여 년 전에 지어진 보호각 안에 서 있다.

 이 불상들은 선방사지에 넘어져 흩어져 있던 노천불(露天佛)을 1923년 다시 세워 놓은 것이다. 1945년에 간행한 <경주 남산의 불적(慶州 南山의 佛蹟)>에 의하면 1923년에 조사할 때까지 삼체석불은 제각각의 위치에 누워있었다 한다. 옛날 터전이었다고 생각하는 법당 터에 다시 세웠는데 법당 자리는 이미 심히 교란되어서 제 모습 찾아 재현하가 어려웠다. 보호각은 신식의 목조로 지은 건축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 맞배기와 지붕을 하고 있다. 기둥 칸 사이에 벽을 치지 않고 다 개방되어있다.

 중앙의 본존상은 큼직한 돌을 평평하게 다듬고 앞면을 부조(浮彫) 형식으로 조각한 우람한 체구로서, 커다란 자연석 위에 묵중하게 서 있다. 신체에 비해 얼굴이 큰 사등신(四等身)의 동자형(童子形)이다. 머리카락은 나발(螺髮)이며 육계가 3단으로 된 것이 매우 특징적이다. 얼굴은 사각형으로서 뺨을 부풀게 하고 턱은 완강하게 처리하여 힘과 활력을 나타내었다. 눈은 눈두덩을 부풀게 하고 눈을 가늘게 처리함으로써 눈웃음을 짓게 하였으며, 양쪽 뺨을 한껏 부풀게 하고 입을 꾹 다물면서 양가를 깊게 파서 미소가 얼굴 가득히 흘러넘치게 하였다. 코는 큼직한 삼각형이며 귀는 어깨에 닿고 있지만 끝이 깨어져 형태가 분명하지 못하다. 목은 짧은 편으로 삼도(三道)[각주:1]의 표현은 보이지 않는다.

 상체는 우람한 면을 과시하지만 하체는 불분명한 다리의 윤곽 등으로 빈약하게 보여 불균형을 이룬다. 어깨의 팽팽한 윤곽 외에 가슴 등은 평평하며 다리의 볼륨이 약간 표현된 것은 주목된다. 시무외ㆍ여원인(施無畏[각주:2]ㆍ與願印[각주:3]을 한 두 손은 적당한 크기이다.

 법의(法衣)는 통견의(通肩衣)[각주:4]를 입고 있는데, 오른쪽 어깨로 가사 자락을 약간 덮고 있고 팔에 걸친 옷자락도 짧고 묵중하게 내렸으며, 그 밑으로 광배에 해당하는 면 전체에 걸쳐 옷자락이 덮어져 내려갔다. 가슴에서 발목까지는 U자형의 옷주름 다섯 가닥이 표현되었는데, 모습은 굵은 요철형의 띠로서 매우 특징적인 것이다.

 우협시는 두광에 화문대와 화불을 조각하였고, 짧은 목걸이와 발목까지 화려하고 무거운 목걸이가 길게 드리워지고 있다. 앳된 미소, 통통한 얼굴과 손, 팔 등은 역시 아이 같은 모습으로 다른 두 상에 비하여 세부표현이 매우 입체적이다. 오른손은 자연스럽게 긴 목걸이를 쥐고 있고, 왼손은 연꽃봉오리를 쥐고 있다. 양감(量感)있고 탄력적인 얼굴, 순진무구한 미소, 짧은 체구, 묵중하고 장식적인 목걸이 등의 장신구, 5구의 화불(化佛)이 새겨진 원형(圓形)의 두광(頭光), 앙련(仰蓮)[각주:5][각주:6]과 복련(覆蓮)[각주:7]이 새겨진 묵중한 대좌(臺座)등에서 기본적으로 본존불상과 동일한 형태인데 그 보다는 좀 더 장식적이라고 할 수 있다.

 좌협시(左脇侍)는 매우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고 왼손에 정병을 들고 있다. 옷주름은 거의 생략되어 있으며, 두광에는 아무 장식이 없어 전체적으로 단순하고 소박하여 좌협시의 복잡하고 화려한 보살상과 대조적이다. 네모난 바위 위에 서서 오른손은 설법인(說法印)[각주:8]으로 가슴에 들고 왼손은 아래로 드리운 채 정병(淨甁)을 쥐고 있다. 보관에 새겨진 작은 부처와 더불어 이 보살이 관음보살(觀音菩薩)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크기는 본존불상 높이 278cmㆍ좌협시보살상 높이 235cmㆍ우협시보살상 292cm이다.


 



<배리석불입상을 통해 알아본 불상 양식의 흐름>

7세기에 들어서면 신라조각에서 새로운 양식이 나타나게 된다. 지금까지의 불상들과는 달리 어린아이 같은 신체비례에 통통한 얼굴을 가진 불상들이 제작되었는데, 이 시기에 신라 불교 조각계는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했다. 그것은 7세기 초에 중국 수나라의 수도 장안에서 귀국한 월광(月光)스님을 비롯한 유학승들이 가져온 중국불상을 통해 새로운 양식이 신라(新羅)에 수용되었기 때문이다. 수(隋)의 조각은 지역적으로 북주(北周)의 조각전통을 계승하였는데 여기에 북제(北齊)와 남조(南朝)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발전했다. 북주조각을 대표하는 가장 특징적인 양식이 바로 아동의 신체 및 얼굴 모습과 흡사한 불상양식이다. 가장 대표적인 불상으로 경주 배리의 선방사라고 전하는 절터에서 발견된 삼존불입상(三尊佛立像)을 꼽을 수 있다. 4등신 가량의 신체비례나 동글동글한 입체미가 강한 조형감, 형태면에서 단순해지고 묵중해진 본존상의 오른쪽 어께위에 대의 끝단이 살짝 걸쳐진 표현은 편삼(偏衫)[각주:9]이라고 해석되기도 하는데, 중국에서는 6세기에 남북조 조각에서 널리 유행하였고 백제시대의 불상인 예산 사방불(四方佛)과 익산 연동리 석불좌상(石佛坐像)에서도 보인다.


 

 

<참고문헌>

 

방홍국,『신라의 마음 경주 남산』, 한길아트, 2002.

신영훈,『경주 남산』, 조선일보사, 1999.

윤경렬 『경주 남산(둘)』, 대원사, 1989.
최성은,『석불 돌에 새긴 정토의 꿈』, 한길아트, 2003.


國立文化財硏究所,「慶州南山의 佛敎遺蹟 2」-西南山 寺址調査報告書-, 1997.

國立文化財硏究所,「慶州南山-精密學術調査報告書」,경주시,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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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불교에서 깨달음에 이르는 3가지 수행단계를 이르는 용어. 불교의 이상을 실현하는 세 가지 과정인 견도(見道)·수도(修道)·무학도(無學道)를 말한다. [본문으로]
  2. 시무외인(施無畏印): 이포외인(離怖畏印)이라고도 한다. 말 그대로 중생에게 무외(無畏)를 베풀어 공포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우환과 고난을 해소시키는 대자의 덕을 보이는 인상이다. 손의 모습은 오른손을 꺾어 어깨높이까지 올리고 다섯 손가락을 가지런히 펴서 손바닥이 밖으로 향하게 한 형태이다. 나를 믿으면 두려움이 없어진다는 뜻이다. 여원인(與願印)과 함께 한국 삼국 시대의 불상에서 그 종류와 관계없이 모두 취하고 있는 인상이다. 그래서 이 둘을 통인(通印)이라 한다. 여원인과 마찬가지로 부처님이 이 수인을 한 때와 장소가 뚜렷하지 않기 때문에 불상이 이 수인을 하였다고 해서 그것이 어떤 장소, 어떤 의미를 나타낸 것인지 확실치 않다. [본문으로]
  3. 왼팔을 길게 아래로 늘어뜨리고 손가락을 펴서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도록 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이때 마지막 두 손가락을 약간 구부린 불상이 많다. 오른손을 어깨높이로 올리고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는 시무외인과 반대되는 형상인데, 대개 오른손은 시무외인을, 왼손은 여원인을 하는 경우가 많다. [본문으로]
  4. 옷 모양새 가운데 양 어깨를 모두 덮은 경우를 이른다. [본문으로]
  5. 연꽃 따위가 위로 향한 모양(模樣). 또는 그 무늬 [본문으로]
  6. 연꽃 따위가 아래로 향한 모양(模樣). 또는 그 무늬 [본문으로]
  7. 연꽃 따위가 아래로 향한 모양(模樣). 또는 그 무늬 [본문으로]
  8. 전법륜인(轉法輪印) 이라고도 한다. 부처의 설법은 이상적인 제왕 전륜성왕(轉輪聖王)이 윤보(輪寶)로써 적을 굴복시키듯 법으로 일체 중생의 번뇌를 제거하므로 전법륜(轉法輪)이라 한다. 전법륜인은 이때 부처님이 하신 손 모양으로, 양손을 가슴까지 올려 엄지와 장지 끝을 서로 맞댄 후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하여 펴진 마지막 두 손가락 끝을 오른쪽 손목에 대고, 오른손은 손바닥을 밖으로 향한 형태이다. [본문으로]
  9. 승기지와 부견의를 봉합(縫合)하고 옷섶을 단, 중의 옷. 상반신을 덮고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옆구리에 걸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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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가흥리 마애삼존불상, 암각화


김 솔


영주시(榮州市) 가흥리(可興里)에 위치한 마애삼존불상(磨崖三尊佛像)은 남동향하여 강변 암벽 한가운데에 새겨져 있다. 마애불의 왼편 벼랑에는 암각화(岩刻畵)가 새겨져 있어 주목된다. 암각화는 여덟 개의 방패 모양 혹은 칼 손잡이 모양인 검파식(劍把式) 형태로 배열되어 있다. 문양의 단출한 형태로 미루어볼 때, 제작 시기는 삼한 내지 삼국시대 초기로 추정된다. 또 암벽에는 구멍을 쫀 성혈(性穴)의 흔적도 뚜렷하게 남아있다. 경치 좋은 강변에서 어로와 수렵, 농경을 토대로 살았던 고대인들의 공동체적 신앙터였던 증거이다. 강변로가 나는 바람에 제단의 분위기는 깨졌지만, 암벽 앞에 서면 신성한 장소였음을 어렵지 않게 감지할 수 있다. 불교 정착 이후 암각화보다 신성(神性)이 강한 부처를 조성한 까닭인지, 암벽의 가장 높았던 바위에 마애불이 조각되어 있다. 마애불 앞의 비좁은 턱에는 건물 기둥을 세웠던 흔적들이 남아있다.

영주 가흥리 마애불상은 북방 고구려의 문화가 들어오는 길목인 죽령(竹嶺)으로 연결되는 교통로 상에 위치하여 그 중요성이 강조되는데, 본존상의 입체감과 좌우협시보살입상의 동적인 움직임 등은 삼국시대 신라 마애불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석조각의 새로운 활력을 느끼게 한다.



  영주 가흥리 마애삼존불상(榮州可興里磨崖三尊佛像)


   통일신라 7세기 후반, 보물 제221호, 본존 높이 3.2m, 좌협시보살상 2m, 우협시보살상 2.3m


통일신라로 들어오면서 불상조각은 입체감과 양감이 발달한 초당(初唐) 양식의 영향을 받아 점차 세련되어지기 시작한다. 삼국통일 시기에 활발한 대중교류를 통해 당의 문물이 수입되는 가운데 새로운 양식의 불상들이 많이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643년 당(唐)에서 귀국한 자장(慈藏)스님이 대장경과 불상 등을 가지고 왔는데, 이때 가져온 장경이 400여 함이라고 하니 불상 또한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초당 불상들은 통일시기 신라조각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고신라 불상들의 양식에서 변화하는 과도기의 영주 가흥리 마애삼존불상은 이 시기의 불상으로 추정된다.


삼존불상은 고부조로 조각되어 원각상에 가까운 입체감과 양감을 보인다. 본존상의 머리는 민머리이고, 얼굴은 둥글고 살이 많아 뺨이 팽팽하며, 가볍게 다문 입가는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대의는 양 어깨를 가리도록 통견(通肩)식[각주:1]으로 입었고, 어깨와 가슴 위로는 옷주름이 묵직하게 흘러 친의 두꺼운 질감을 잘 나타내고 있다. 두 손으로 짓고 있는 시무외인[각주:2]ㆍ여원인[각주:3]의 수인이 매우 자연스럽다. 연꽃으로 장식된 두광 안에는 세 화불이 떠 있고, 두광 밖으로는 화염문 방식이 간결하다. 본존의 앉은 자리를 감싼 대좌의 연잎이 큼지막하고 시원스럽게 피어올라 있다. 눈이 손상되지 않은 상태였다면, 둥실하게 살이 오른 동안(童顔)의 표정이 좋았을 것이다. 이는 고신라 불상들에서 볼 수 있는 양식적 특징으로, 신라 통일 직후의 조각미를 보여준다.

좌협시보살상은 두 손을 올려 천의를 쥐고 있는데 비록 눈은 손상되었으나 귀여운 아기 같은 얼굴 모습은 그대로 남아 있다. 또한 이 보살상은 약간의 움직임이 표현된 몸체를 본존상 쪽으로 살짝 기울이고 있는데, 이는 당 양식의 영향이라고 생각된다. 몸의 앞부분은 7세기 전반부터 신라 지역에서 크게 유행했던 2단 천의 형식을 보여준다. 반대편의 우협시보살입상은 갸름하고 예쁜 얼굴에 입술이 섬세하게 조각되었으며 두 손을 들어 합장한 채로 서있다. 한편 2003년 여름에 내린 폭우로 삼존불 앞쪽의 바위가 갈라지면서 한 구의 마애불좌상이 더 발견되었다.

이 마애불은 통일신라시대의 조각 흐름을 잘 보여주는 사실주의적 불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김덕삼이라는 부자가 자식을 얻으려고 원불(願佛)로 조성했다는 전설도 전한다.


사진 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 http://www.cha.go.kr/



영주 가흥리 암각화(榮州可興里岩刻畵)


    경북유형문화재 제248호


우리나라 마애불의 시원으로서, 무교적 바위 신양에서 불교로 변화된 증거가 같은 공간에 남아있는 사례로 영주 가흥동의 마애삼존불과 암각화를 들 수 있다. 영주는 신라의 북쪽이자 고구려와 인접했던 지역으로, 낙동강 상류의 너른 강변과 소백산맥이 병풍처럼 펼쳐진 공간에 마애불과 암각화가 위치해 있다. 암각화는 여덟 개의 방패 모양 혹은 칼 손잡이 모양인 검파식(劍把式)형태의 이방연속무늬[각주:4]로 배열되어 있다. 선을 쪼아서 굵은 선으로 표현하는 수법을 사용하였고, 암벽에는 구멍을 쫀 성혈의 흔적도 뚜렷하게 남아있다. 이는 고령 양전동 암각화와 울산 천전리 암각화에서 볼 수 있는 수법이다. 암각화의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문양의 단촐한 형태로 미루어볼 때 제작 시기는 삼한시대나 삼국시대초기로 추정된다. 아마도 이곳은 경치 좋은 강변에서 어로와 수렵 그리고 농경을 토대로 살았던 고대인들의 공동 신앙터였을 것이다. 현재는 강변로가 나는 바람에 제단의 분위기는 깨져 있지만, 암각화의 위치에서면 신성한 장소였음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그런 곳이기에 불교가 정착된 뒤로는 암각화보다 신성(神性)이 강한 마애삼존불을 조성했을 것이다.




   한국 마애불 변천 양식


마애불은 벼랑의 바위에 새겨놓은 불상을 말하는데, 마암불(磨岩佛)이라 부르기도 했다. 땅과 한몸을 이룬 암벽에 조각해 놓았기 때문에 마애불은 그것을 조성한 당대 사람들의 심성과 미의식은 물론 부처를 새기기 위해 선택한 바위의 지형적 특성을 생생히 파악하게 해준다. 그리고 조성 당시부터 현재까지 이어온, 무불(巫佛)이 혼재된 신앙 형태가 뚜렷이 남아 있는 편이다.[각주:5]

따라서 마애불은 어느 문화유산보다 가연과 종교와 예술, 그리고 삶의 흔적이 함께 어우러진 공간을 연출하고 있다. 우리 불교 미술사에서 마애불은 자연에 거스름 없이 신앙과 예술을 조화시켜낸 한국문화의 특성이 가장 뚜렷하게 반영된 유산으로 꼽을 만하다.

이러한 마애불은 600년을 전후한 백제의 서산 마애삼존불에서 시작하여 구한말 서울주변의 마애불까지 1300년 동안 꾸준히, 그리고 200여 곳이 넘는 전국에 걸쳐 조성되어 왔다.

 한국의 불교미술사에서 마애불이 발생한 시기는 600년 전후로 추정된다. 충남 서해안 지역인 서산과 태안반도에 조성된 마애불을 시발로 잡는데 이는 백제의 공주시대 이후 바다를 통해 중국과 교역하였던 요지였기 때문이다. 한국 마애불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서산 마애삼존불이 보여주듯이 한국의 마애불은 암벽의 형태와 바위의 결을 최대한 살린 뛰어난 조각미를 창출하였다.

불국토 건설을 꿈꾸던 신라인의 이상미가 반영된 8세기 신라의 마애불은 부처의 육신을 탄력 있게 잘 살린 부조예술의 뛰어난 기량을 뽐냈으나 이 또한 바위의 원형을 최대한 살리려는 배려를 잊지 않고 있다. 주로 당시의 수도였던 경주 주변에 조성되어 있으며 이상화된 종교의식과 최고의 조각미가 완벽하게 결합하여 불교미술의 절정을 이루었던 시점과 때를 같이한다.

신라 후기 지방 호족 세력의 성장과 함께 마애불의 조성이 확산되면서, 그 호족의 미의식이 실린 9세기 마애불부터는 절대적 존재로서의 이상화된 부처의 정형이 깨지고 조각수법이 다양해졌다. 표정은 딱딱해졌지만 바위에 새긴 변상도나 불화 같은 이미지의 선각형 마애불이 출현하였고, 안면은 부조로 조각하면서 몸은 선묘로 새기는 독특한 형식도 창출되었다.

마애불이 가장 많이 조성된 전성기인 고려에 들어서서는 신라 말의 사회적 전통을 배경으로 한 마애불이 가장 유행하였다. 지방 호족의 후원 아래 조성되면서도 민중의 감성과 함께하는 마애불들이 경기ㆍ충청ㆍ전라도 지방 곳곳에 들어섰다. 고려시대 이후 괴력을 갖춘 신이적인 존재로서의 돌부처, 곧 토속미 가득한 마애불 조각에는 부처의 도상적 격식보다 기복신앙의 의미가 강조되어 있는데 이는 ‘괴체의 미학’을 구현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고려시대이후 사대부 문인 문화의 융성과 함께 정치이념이 유교로 바뀌게 되면서 조선시대에는 수도인 한성주변을 제외하고선 마애불의 조성이 급격히 줄어들게 된다. 그러나 마애불을 새긴 암벽이나 바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변형하지 않았다는 점은 우리 마애불의 변함없는 특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암각화 변천 양식


옛 사람들은 바위가 자신들의 간절한 염원을 들어주는 영원의 매개체라 믿었다. 또한 그림 자체가 사람들의 바람을 재현하고 있었고, 주술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주술적인 마력이 있는 돌에 주술적인 수단이자 삶의 목표를 그림으로 그렸다는 것은 바로 신앙적인 사고의 표출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성소에 있는 돌에 자신들의 바람을 표현하기 위해 또 그 바람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간절한 마음을 모아 암각화를 제작하였던 것이다.

암각화의 그림을 새기는 작업은 신으로부터 특별한 능력을 부여받은 샤먼이나 제사장만이 할 수 있었으며 특별한 장소에 있는 바위를 선택하여 대부분 동남쪽이나 남쪽을 향하게 하여 그림을 새겼다. 돌에 새겨진 그림들은 형태에 따라 세 가지로 분류 되는데 사물의 형상을 사실대로 표현한 물상(物象)문양과 동그라미ㆍ겹 동그라미ㆍ세모ㆍ마름모 등과 같은 기하학문양, 그리고 신상(神像을) 새긴 문양이 있다. 대부분의 암각화 유적지는 강가의 바위 절벽이나 강과 인접한 곳에 있거나, 산으로 둘러싸인 봉우리에 있다.

우리나라의 암각화들은 대부분 신석기시대 후기부터 초기 철기시대에 속하는 유적들이다. 1970년 12월 25일 울산 천전리 암각화가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으며, 이듬해 고령 양전동과 울산 대곡리 반구대의 암각화가 발견되면서 지금까지 10여곳 이상에서 암각화가 확인되었다.




  <참고 문헌>


박정근 외,『한국의 석조문화』, 다른세상, 2004.

이정수ㆍ박원출ㆍ조원영,『테마가 있는 한국문화』, 선인, 1999년.

이태호ㆍ이경화,『한국의 마애불』, 다른세상, 2001.

최성은, 『석불 돌에 새긴 정토의 꿈』, 한길아트, 2003.

최성은, 『KOREAN Art Book』석불ㆍ마애불 편, 예경, 2004.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엮음,『답사여행의 길잡이』경북 편, 돌배게, 1995.


박정근,「한국의 암각화 연구 성과와 문제점」, 한국고대학회, 선사와 고대 제15호, 2000.

이성도,「백제ㆍ신라 마애불의 조형성 연구」, 한국미술교육학회, 미술교육논총 美論20券, 2006.

장두영,「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마애불 연구」, 한남대 대학원, 2003.

문화재청 홈페이지 : http://www.ch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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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불상이나 승려의 옷 모양새 가운데 양 어깨를 모두 덮은 경우를 이른다. 통양견(通兩肩)·통양견법 또는 통피(通披)라고도 한다. ‘양 어깨를 통하여 나타난다’는 뜻이다. 여기서 나타난다는 것은 복전(福田)이 나타난다는 뜻인데, 이는 공경을 나타내는 편단우견(偏袒右肩)과 대치된다. 비구가 거리에 나가 걸식할 때는 통견을 하는 것이 원칙이다. [본문으로]
  2. 施無畏印: 이포외인(離怖畏印)이라고도 한다. 말 그대로 중생에게 무외(無畏)를 베풀어 공포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우환과 고난을 해소시키는 대자의 덕을 보이는 인상이다. 나를 믿으면 두려움이 없어진다는 뜻이다. 여원인(與願印)과 함께 한국 삼국 시대의 불상에서 그 종류와 관계없이 모두 취하고 있는 인상이다. 그래서 이 둘을 통인(通印)이라 한다. 여원인과 마찬가지로 부처님이 이 수인을 한 때와 장소가 뚜렷하지 않기 때문에 불상이 이 수인을 하였다고 해서 그것이 어떤 장소, 어떤 의미를 나타낸 것인지 확실치 않다. [본문으로]
  3. 오른손을 어깨높이로 올리고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는 시무외인과 반대되는 형상인데, 대개 오른손은 시무외인을, 왼손은 여원인을 하는 경우가 많다. [본문으로]
  4. 양쪽 또는 아래위로 연결되어 두 방향으로 전개되는 연속무늬 형식. [본문으로]
  5. 마애불은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의 산악숭배, 암각화, 거석문화 등 선사시대부터 형성된 무교적 신앙형태와 결합하면서 발전하였다. [본문으로]
Posted by so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