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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6.07 7세기 동아시아 외교관계를 통해 살펴본 신라의 삼국통일 4 by soul
  2. 2009.06.01 중세 기독교의 발전과 교황권 7 by soul
  3. 2009.05.31 경주배리석불입상(慶州拜里石佛立像) by soul
  4. 2009.05.17 영주 가흥리 마애삼존불상, 암각화 조사 by soul
  5. 2009.05.05 Claude Lévi-Strauss 1 by soul


Ⅰ. 書論

Ⅱ. 本論
 Ⅱ-1. 수(隋)제국의 등장과 고구려(高句麗)의 도전
 Ⅱ-2. 당태종(唐太宗)과 연개소문(淵蓋蘇文)의 대결
 Ⅱ-3. 7세기 신라(新羅)의 대외관계
 Ⅱ-4. 신라 동맹외교의 승리

Ⅲ. 結論


김 솔

Ⅰ. 서론


기원후 600년대의 시기는 어떠했을까? 당시의 시기는 우리 역사뿐 아니라 동아시아 역사에서 가장 큰 발자취를 남긴 시기라고 필자는 평가한다.

기원(紀元) 경에 각기 성립되어 발전하던 삼국(三國)[각주:1]은 4~6세기를 지나면서 두드러진 중앙집권체제(中央集權體制)로의 발전을 보인다. 이러한 중앙집권체제 아래에서 사적인 세력기반이 축소된 지배층은 중앙귀족으로 편제되고,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새로이 부를 축적한 세력이 성장하면서 중앙귀족의 수도 증가하였다.

이 과정에서 삼국의 지배세력은 빈번하게 대외전쟁을 일으키게 되고, 이에 따라 7세기에 들어서서 고구려(高句麗)ㆍ백제(百濟)ㆍ신라(新羅) 삼국 사이에 전쟁이 더욱 치열해지게 된다.

삼국간의 전쟁은 당시의 국제정세 속에서 동아시아 차원의 전쟁으로 확대된다. 신라가 한강유역을 점령한 후 고구려와 백제는 신라에 대한 공세를 가하기 시작했고, 고립된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압력에 대항하여 수(隋)[각주:2]ㆍ당(唐)[각주:3]과의 외교관계에 힘을 기울이게 된다. 당시 수ㆍ당은 중국을 통일하고 돌궐(突厥)[각주:4]과 고구려의 문제[각주:5]를 해결하고자 고구려를 침략하였는데, 고구려의 강력한 저항으로 실패하였던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라와 당은 서로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킨다.[각주:6]

이후 한반도 안에서는 신라가 남아 삼국의 문화를 융합ㆍ발전시키며 우리 역사의 중요한 이정표를 세웠으며, 동아시아 세계에서는 당을 중심으로 한 중화문화권(中華文化圈)[각주:7]이 탄생하게 된다. 이러한 높은 당의 문화는 일본에게 한국과의 관계를 통해 선진문물을 유입하는 것에서, 중국으로부터의 직접적인 문물 유입을 통한 독자적인 발전의 길을 걷게 한다. 또한 북방의 돌궐은 동ㆍ서로 분열되어 당의 영향력 아래 들어오게 된다.

이처럼 7세기에 한반도에서 일어났었던 삼국통일은 단지 한국사만의 문제에서 끝나지 않고, 동아시아 역사 전체에 크나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삼국의 통일은 급박한 동아시아의 국제관계 속에서 탄생한 산물이었으며, 스스로도 동아시아 세계에 큰 영향력을 준 사건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러한 이유로 본고에서는 삼국의 신라에 의한 통일의 이유를 당시의 국제관계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Ⅱ. 본론


Ⅱ-1. 수제국의 등장과 고구려의 도전


북조(北朝)국가인 수의 문제(文帝)[각주:8]는 588년 말 남조(南朝)국가인 진(陳)[각주:9]에 대한 원정을 행한다. 이로써 중국은 오랜 분열 끝에 다시금 통일되어 국력을 떨치게 되었지만, 반면 주변의 모든 국가들은 이와 같은 새로운 사태의 돌발에 크게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까지 동아시아세계에서 중국에 가장 위협적인 세력은 돌궐이었다. 투르크 계통의 돌궐은 552년 유연(柔然)[각주:10]을 타도한 이래 마침 동서로 갈라져 있던 북조를 압박하여 두 나라로부터 조공(朝貢)을 받고 있었다. 비록 서쪽의 북주(北周)[각주:11]가 576년 동쪽의 북제(北齊)[각주:12]를 멸망시켜 북조는 다시금 통일되었으나, 돌궐의 위세는 여전히 강성하였다. 그러나 581년 북주를 찬탈한 수의 문제는 이간책(離間策)을 써서 돌궐을 동서로 분열시키는데 성공한다.

한편 고구려의 평원왕(平原王)[각주:13]은 590년 장차 있을지도 모르는 수의 침략에 대비하여 병기를 수리하고 곡식을 저축하는 등 전쟁준비에 착수한다. 이때 고구려는 많은 재물을 들여 중국으로부터 노공(努工)을 몰래 초빙하기까지 하였다. 수의 문제도 이 같은 낌새를 눈치 채고 평원왕에게 국서(國書)를 보내어 고구려가 성의를 다하지 않는다고 불평을 늘어놓은 다음 “요하(遼河)가 넓다고 하지만 어찌 양자강(陽子江)에 비할 수 있으며, 고구려 인구가 많다고 한들 어찌 진(陳)나라에 비할 수 있으랴!” 라고 하면서 노골적으로 고구려를 위협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평원왕은 290년 죽고 태자인 영양왕(嬰陽王)[각주:14]이 즉위한다. 마침내 영양왕은 598년 수에 대한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고구려는 말갈 기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요하를 건너 요서지방을 공격했다. 수문제는 수륙 30만 대군으로 반격에 나섰으나, 육군은 요서지방으로 부대 이동 중 장마로 병참선이 끊어져 병사들은 굶주리고 더욱이 전염병이 돌아 전투력을 상실했고, 황해를 항해하던 수군 또한 태풍을 만나 고구려군과 싸워보지도 못한 채 이해 9월 철수하고 말았다. 이때 수군은 죽은 자가 10명중 8,9명이나 되었다고 하니 그 참상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수문제는 604년 죽을 때까지 고구려 침략을 단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문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양제(煬帝)[각주:15]는 주변국가의 군주들을 입조(入朝)시켜 중국 천자(天子)의 위업을 과시하는 일에 집착하며 고구려 사신에게 고구려왕의 입조할 것을 요구한다.

물론 고구려는 이를 거부하며 돌궐ㆍ왜국과의 동맹외교를 추진한다. 고구려-돌궐과의 동맹관계는 중국에 대한 일종의 포위망 구축을 의미했으며, 나아가 이 동맹은 왜국까지 확대될 개연성은 충분하였다.

또한 영양왕 당시 고구려와 왜국과의 관계가 전례 없이 긴밀했던 것은『일본사기(日本書記)』[각주:16]에 의하면 이 시기 고구려로부터 혜자(惠慈)[각주:17]등의 승려가 등이 도일하여 지도적인 업적을 남겼다. 특히 혜자대사는 595년 도일하여 615년 귀국할 때까지 꼭 20년간 체류하였는데, 고구려와 수의 관계가 절박했던 당시 왜국으로 하여금 중립을 지키게 할 외교전선을 편 것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다. 그가 일본에 있을 때인 607년 왜국은 수에 두 번째의 사신을 보낸다. 그런데 그 국서의 첫 머리에 “해뜨는 곳의 천자가 글을 해지는 곳의 천자께 드립니다. 이상 없습니다” 라고 하여 수양제를 격노하게 했다는 것은 예전부터 회자되는 일화인데, 이 같은 표현이 어쩌면 고구려의 수에 대한 적개심이 혜자대사를 통해서 표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 뒤 서역지방에 유목민족국가인 토욕혼(吐谷渾)[각주:18]이 동서의 교통을 위협하자 수양제는 중앙아시아지방에 사신을 보내 외국상인을 유치하는 한편 609년에는 스스로 토욕혼 원정에 나선다. 비록 이 원정은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으나, 그의 연지산(燕支山, 현재의 甘肅省지방) 南巡 때 고창국(高昌國)과 이오국(伊吾國)의 왕을 비롯하여 서역 27개국 사신들의 배알(拜謁)을 받은 것은 수의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 또한 그간 내란으로 피폐해지긴 했으나 신강성(新疆省) 서북경의 서돌궐 전 可汗 處羅[각주:19]가 611년 수천 명을 이끌고 와서 양제에게 배알한 것도 그즈음 높아진 권위를 말해준다.[각주:20] 이처럼 양제는 그 위세가 극에 달했던 611년 5월 마침내 고구려 침략을 위한 총동원령을 내린다. 이듬해 정월 113만 3800명에 달하는 대군이 막 개통된 대운하 영제거(永濟渠)[각주:21]로 탁군에 집결을 완료했다. 수의 대군이 요하를 건너 요동성(遼東城) 공격에 나섰다가 전선이 교착되자 30만 5000명의 별동대를 편성, 압록강을 건너 평양성을 향해 직진했다가 고구려군에 참패를 당한 것은 너무나 유명한 사실이다. 중국 측의 기록에는 이때 요동으로 돌아간 자가 겨우 2700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수양제는 이듬해 많은 공설(攻城)장비를 준비하여 2차 침략에 나섰으나 본국에 내란이 일어나자 철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614년 농민반란이 전국적으로 만연한 가운데 무리하게 3차 침략에 나섰다가 고구려가 유화책(宥和策)을 쓰자 대군을 돌이키고 말았다. 수가 고구려 침략에 잇따라 참패하고, 이로 말미암아 전국이 반란에 휩싸이자 지금까지 수에 복종해 왔던 동돌권이 마침내 등을 돌렸다. 啓民의 후계자인 始畢可汗은 615년 수양제가 장성 시찰에 나서 산서성(山西省) 북부 장성 가까운 곳에 이르렀을 때 돌연 10여만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기습 포위했다. 양제 일핸은 가까운 성으로 피신하여 농성에 들어갔다. 동돌궐은 양제를 구원하기 위해 대군이 오는 줄로 잘못 판단하여 포위를 풀고 가버려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했다. 하지만 양제는 618년 친위대 간부의 반역음모에 의해서 살해되고 말아 통일제국 수는 뜻밖의 단명에 그치고 만다.



Ⅱ-2. 당태종(唐太宗)과 연개소문(淵蓋蘇文)의 대결


수에 대신하여 618년 등장한 당은 호한(胡漢)이 혼합된 제국이었다. 그런 만큼 변경의 안녕을 꾀하려는 이이제이적(以夷制夷的) 정책[각주:22]을 기본으로 했다. 하지만 수말의 혼란을 틈타 이연(李淵)[각주:23]이 태원(太原)[각주:24]에서 거병할 때 돌궐과 결맹(結盟)하여 군웅(群雄)을 제압하려는 책략에서 동돌궐의 始畢可汗[각주:25]에게 칭신(稱臣)한 약점이 있어 당의 건국 초기부터 돌궐의 잦은 침략을 받게 되었다. 특히 625년 돌궐이 대거 쳐들어와 당군이 수도 장안(長安)에서 멀지 않은 태곡(太谷, 山西省 太原부근)에서 참패하자 고조는 천도하기도 한다. 또한 같은 시기에 오늘날의 청해성(靑海城) 일대에 반거하고 있던 토욕혼도 끊임없이 당의 영내로 침투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626년 고조의 차남 이세민(二世民)[각주:26]이 현무문의 변(玄武門之變)[각주:27]으로 황제에 즉위하면서 당은 대전환을 맞게 된다.

태종이 630년 동돌궐제국을 무너뜨린 뒤로부터 그 아들 고종(高宗) 때인 670년 설인귀(薛仁貴)[각주:28] 휘하의 당군 10만이 대비천(大非川, 靑海城 부근) 전투에서 토번(吐蕃)[각주:29]에게 괴멸적 타격을 입을 때까지의 40년간 당의 국세는 최고에 달하였다. 즉 630년 태종은 설연타의 협력을 얻어 동돌궐을 멸망시켰다. 마침 같은 해 서돌궐도 분열되어 이후 약화의 길을 걸었다. 이처럼 돌궐이 약해지자 그 대신 토욕혼과 설연타(薛延陀)[각주:30]가 일어났으나, 당군은 635년 토욕혼왕국을 철저히 정복하였고, 646년에는 돌궐 기병의 협력을 얻어 설연타왕국을 정복하였다. 한편 당군은 640년 8월 서쪽으로 7000여리 떨어진 서역 투르판분지의 고창국을 멸망, 그곳을 기반으로 하여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각주:31]를 설치했다.

이처럼 당제국은 세계제국을 자랑할 만큼 수많은 이민족을 상대하고 있었다. 당의 팽창 추세에 일대 쐐기를 박은 티베트 계통의 토번만 해도 당의 대군이 고구려 침략에 열중하고 있던 바로 그 시기에 토욕혼의 옛 땅을 취하면서 급속이 세력을 키웠다. 한편 668년에 고구려가 멸망된 후 바야흐로 신라와 당 사이에 전쟁이 열렸을 때 당이 신라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전력을 기울이지 못한 채 676년 끝내 철군하면서 평양에 있던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각주:32]를 만주의 요동성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던 까닭도 이 토번의 침략 위협이 절박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신라가 당과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종국에는 동맹관계였던 당을 상대로 하려 대전을 벌이게 되기까지의 삼국 관계의 추이와 이에 병행하여 이들 나라가 추진했던 대당 교섭의 경과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주지하듯 신라는 주로 그 입지조건으로 말미암아 삼국 중에서 국사 형성이 가장 늦었다. 더욱이 신라는 중앙집권국가를 향해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고구려의 군사적 도움을 받았고, 뒤에는 백제와 동맹하여 고구려의 남침에 공동으로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지만 6세기에 들어와 신라는 국가의 지배체제를 크게 정비하는 한편 영토 확장 전쟁에 착수하여 낙동강 유역의 여러 나라를 병합했고, 한강 상류에서 하류로 진출하여 한반도 중부지방을 차지하는 등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 이처럼 신라는 560년대에 이르러 백제를 제치고 고구려에 대항하는 등 삼국항쟁의 대열에서 단연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게 되었다. 다만 이로써 백제ㆍ고구려 양국을 상대로 전쟁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다행히 6세기 후반은 백제나 고구려 모두 국내 문제로 분망했으므로 이렇다 할 큰 침략전쟁은 없었다.

그러나 수가 중국을 통일하고 곧이어 598년 고구려에 대한 침략전쟁을 벌인 뒤부터 삼국간의 항쟁은 격화되어 간다. 600년 5월 즉위한 백제의 무왕(武王)[각주:33]은 수와의 외교교섭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무왕은 수양제가 장차 고구려를 칠 낌새를 눈치 채고 607년 수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 원정을 요청했다. 이에 수양제는 만족하여 무왕에게 고구려의 동정을 엿보도록 격려했다. 하지만 정작 수군이 요하를 건너자 무왕은 수를 돕는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신라 공격에 열을 올렸을 뿐이다. 이처럼 이해관계의 형평을 깊이 파악하지 못한 채 국가 간의 신의에도 충실치 못한 무왕의 이중적인 외교자세는 당이 건국된 후에도 되풀이 되었고, 그의 후계자인 의자왕(義慈王)[각주:34] 또한 변함이 없었다. 그 결과 백제는 끝내 당의 불신을 초래했을 뿐 아니라 고구려와도 관계를 개선할 기회를 포착하지 못했다. 백제는 오로지 바다 건너 왜국과의 전통적인 우호관계의 유지에 만족했을 따름이었다.


     당이 건국된 618년 고구려에서는 영양왕이 죽고 영류왕(榮留王)[각주:35]이 즉위했다. 고구려는 지난번 수와의 전쟁으로 지쳐 있었던 탓인지 당과 친선관계를 꾀했다. 고구려는 619년 이래 사신을 보내어 조공했고, 622년 당 고조가 중국 내의 고구려군 포로를 송환해 주는 조건으로 고구려 내의 중국인 포로를 돌려보내라고 요청했을 때는 이에 응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631년 당의 사신이 와서 지난번 수양제의 고구려 침략전쟁 때 죽은 중국 병사들의 유해를 파묻어 제사 지내는 한편 고구려가 전승을 기념을 만든 경관(京觀)[각주:36]을 헐어버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고구려는 즉각 장차의 전쟁에 대비하여 요동반도 남단의 비사성(卑沙城)[각주:37]으로부터 동북쪽으로 扶餘城(農安)에 이르는 1천여 리에 달하는 장성 축조에 착수한다. 이 공사는 16년 만에 완료되었다.

당은 640년 고창국을 멸망시킴으로써 고구려를 제외한 모든 적대세력을 정복했다. 당의 다음 공격목표가 고구려인 것은 명백해 보였다. 그러던 중 642년 10월 장성 축조공사를 책임지고 있던 연개소문(淵蓋蘇文)[각주:38]이 쿠데타를 일으켜 영류왕을 시해하고 정적 다수를 죽인 다음 국가의 대권을 장악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 직후 새로운 사태가 발생한 것을 계기로 태종은 마침내 침략전쟁을 결심하게 된다. 그것은 643년 9월 신라 사신이 와서 백제와 고구려가 연합하여 신라의 입공로를 막는다고 호소한데서 발단되었다. 그러자 당은 고구려왕에게 국서를 보내어 신라에 대한 공격을 중지할 것과 만약 다시 신라를 친다면 당나라 군대가 고구려를 칠 것이라고 위협했다. 이때 신라전선에서 돌아온 연개소문은 당의 사신을 만나 “지난날 수가 침공했을 때 신라가 빼앗아 간 고구려 땅 500 리를 돌려주지 않는 한 신라 공격을 중지할 수 없다”고 태종의 제의를 거부했다. 그 뒤 다른 사신이 평양에 와서 연개소문을 설득하려 하자 그는 사신을 토굴 속에 연금하기까지 했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태종은 전군에 동원 준비 명령을 내렸다. 반년 이상의 준비 끝에 645년 4월 요하를 건넌 당의 대군이 안시성(安市城)[각주:39]전투에서 교착되고 마침 동(冬)기가 다가오자 당태종이 참담한 모습으로 본국에 귀환한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태종은 그 뒤 647년과 648년에 군대를 보내 고구려를 쳤으나 번번히 실패했고, 649년 5월 보다 큰 규모의 침략군을 준비하다가 죽었다.



Ⅱ-3. 7세기 신라의 대외관계.


진흥왕(眞興王)[각주:40] 15년(554)의 관산성(管山城)전투[각주:41]는 신라-백제의 관계내지는 한반도의 세력판도에 커다란 전기를 가져왔다. 이 싸움은 나제동맹(羅濟同盟)[각주:42]을 파기시켰으며, 반대로 백제와 고구려는 급속히 가까워지게 되었다. 이 전쟁을 통해 신라는 한강유역을 차지하여 중국과의 직접적인 연결통로를 갖게 되었다. 이제 신라는 진(陳)ㆍ북제(北齊)ㆍ수(隋) 등과 직접 통할 수 있었고, 백제와 고구려를 차단하여 양국의 연결을 막을 수 있었다. 다만, 이러한 사태변화는 고구려-백제에게 위협을 초래함으로써 신라는 국가위기의 극복을 위한 외교적 성과를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진평왕(眞平王)[각주:43] 40년(618)에 당이 등장하였다. 이후 무왕(武王)에 이어 왕위에 즉위한 백제의 의자왕(義慈王)은 국내정치의 안정을 도모한 다음 신라에 대하여 적극 공세를 취하였다. 그는 642년 친히 군사를 이끌고 신라의 서쪽 변방 40여 성을 빼앗았으며, 8월에는 고구려와 함께 신라의 대당교통로인 당항성(黨項城:화성시)을 공격하였다. 또한 장군 윤충(允忠)으로 하여금 군사 1만으로 신라의 대야성(大耶城)[각주:44]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 선덕왕(善德王)[각주:45] 11년(642)의 대야성전투는 삼국간의 세력 판도를 급변시킨 대사건이었다. 이 전투는 신라와 백제간의 관계를 파국으로 유도하였으며, 김춘추(金春秋)[각주:46]는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고구려를 방문하였으나 실패하고, 당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


Ⅱ-4. 신라 동맹외교의 승리


신라는 643년 9월 당에 사신을 보내어 백제와 고구려가 연합하여 당항성(黨項城)[각주:47]으로 대규모로 침공할 듯하다고 하면서 구원병을 요청했다. 당시의 정황으로 볼 때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공동의 적이기는 했으나, 한편 양국이 연합군을 편성할 만큼 우호적인 관계도 아니었다.

645년 5월 당태종이 친히 대군을 이끌고 요하를 건너 고구려 영내로 쳐들어오자 신라는 이에 호응하여 3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 후방으로 쳐들어갔다. 하지만 당군이 9월 안시성 전투에서 패하여 고구려의 승리로 종결되자 신라의 위기는 다시금 고조되었다. 고구려의 대대적인 반격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백제는 신라군이 출동한 틈을 타서 신라의 서부 국경지대로 쳐들어가 7개성을 탈취한다.

이후 신라는 648년 세 차례나 당에 사신을 보냈는데, 이때 김춘추는 당태종과 단독 회견할 기회를 얻었다. 그는 태종에게 고구려 뿐 아니라 백제까지 멸망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당이 나선다면 이에 신라가 기꺼이 협력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당태종은 김춘추의 제안에 동의를 표했다. 이렇게 하여 이윽고 양국 간의 비밀 협상이 체결되었다. 이때까지 김춘추의 외교적 노력은 고구려ㆍ백제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지켜야 하겠다는 것뿐이었으나, 이 당과의 군사동맹을 계기고 하여 삼국통일의 전망을 갖게 되었다.

나ㆍ당동맹의 원칙은 649년 6월 당의 고종이 태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뒤에 한때 약화되는 듯했으나, 결코 폐기되지 않았다. 특히 654년 3월 김춘추가 즉위하면서 동맹을 구체화하기 위한 노력이 한층 더 강화되었다. 655년 정월 고구려는 말갈 기병부대를 앞세워 신라의 북쪽 경계로 쳐들어와 33개의 성을 함락했는데, 이에 무열왕은 강력히 당에 원병을 요청했다. 이로써 당은 648년 이후 중단됐던 고구려 침공을 재개했다. 당은 그 뒤 658년과 659년에도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659년 4월 백제가 신라 국경지대로 침범해온 것을 계기로 무열왕은 당에 사신을 보내어 백제에 대한 양면공격을 제안했다. 당은 대고구려 전략상 그 배후에 근거지를 확보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 마침내 대대적인 백제 침략전쟁을 결행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 이듬해 나ㆍ당 연합군에 의해서 백제가 멸망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백제멸망의 위기가 한창 고조되었을 때 고구려가 이를 방관하여 마침내 망국의 화근을 초래한 것만 보더라도 백제와 고구려가 끝내 군사동맹에까지 이르지 못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다만 백제와 우호관계를 유지해온 일본이 백제가 멸망된 뒤 그 부흥운동군을 돕기 위해 출병했다가 664년 8월 백강구(白江口)의 해상전투에서 2만 7천명의 대군이 나ㆍ당 엽합군에 참패하고 말았다. 나ㆍ당 연합군은 전승의 여세를 몰아 부흥운동군의 거점을 총공격하여 이를 함락시켰다.

무열왕은 661년 생을 마감하고, 태자이던 문무왕(文武王)[각주:48]이 왕위에 올라 삼국통일의 대업을 물려받았다. 문무왕은 즉위하자마자 군대를 동원하여 당과 함께 고구려 정복에 나섰다. 이윽고 연개소문이 665년 죽고, 그 세 아들 사이에 권력투쟁이 벌어져 고구려는 분열한다. 결국 고구려는 당의 침략군에 가세한 신라군에 의해서 평양성이 함락되어 668년 9월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Ⅲ. 결론


이와 같이 신라의 삼국통일은 단순히 혼자만의 힘으로 가능했던 것은 아니었으며, 그 의지 또한 확실치 않다. 7세기 동아시아의 대외적 틀 속에서 신라가 추구한 외교적 역량은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렇다고 신라 내부의 잠재력을 외면한 것은 아니다. 다만 3국이 처한 각각의 입장과 당나라와의 관계 및 당이 처한 시련 등을 함께 고려한 국제정세를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신라의 삼국통일은 국내ㆍ외의 정세가 결합되어 일어난 사건이다. 중국은 오랜 남북조의 분열을 극복한 수ㆍ당이 중국의 정통왕조로서의 권위를 과시할 필요성이 컸다. 그러나 수ㆍ당의 계속적인 고구려 침공이 실패함에 따라 당은 작전상의 변화를 꾀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여기에 신라의 적극적 친당정책이 주효할 수 있었다. 더구나 말갈ㆍ토번ㆍ설연타ㆍ토욕혼 등 빈번한 변환에 시달인 당으로서는 고구려ㆍ백제 정벌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케 했다.

또한 당시 삼국의 경우는 각각 한반도의 주인공을 자처하는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었다. 대당 강경책으로 한반도의 주인공을 자처한 고구려나, 해동의 강국을 자임한 백제의 경우가 그것이다. 한편 신라는 6세기 한강과 낙동강 유역을 확보함으로써 이룩된 경제적 기반과 정치ㆍ군사제도의 확립에서 오는 백성들의 공민화(公民化)에 따른 강력함이 가능하였다.

신라의 통일은 ‘영토축소와 외세이용’ 이라는 치명적 약점이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것이 지니는 한국사 전개과정에서의 의미는 과소평가 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하나의 주권 밑에 동일한 영토와 국민으로의 일원화’에 단초를 열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신라 통일의 한계와 문제점은 다음의 고려 통일이나 닥쳐올 민족의 통일에 큰 교훈이 된다는 것이다.





<참고문헌>


김기협,『밖에서 본 한국史』, 돌베개, 2008.

김정배,『한국고대사입문2』, 신서원, 2006.

한국역사연구회,『한국역사』역사비평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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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사학회, 문경현,「춘암 (春庵) 송태호 (宋台鎬) 교수의 정년기념 특집호 : 논문 ; 신라 삼국 통일의 연구」, 1996.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김수태,「7세기 동아시아 국제 정세와 신라의 삼국통일 전략 : 특집논문 ; 삼국의 외교적 협력과 경쟁 -7세기 신라와 백제의 외교전을 중심으로」, 2004.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신형식,「7세기 동아시아 국제 정세와 신라의 삼국통일 전략 : 특집논문 ; 설림: 7세기 동아시아 정세와 신라통일의 의미」, 2004.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신형식,「三國統一前後 新羅의 對外關係」, 1985.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이기동,「7세기 동아시아 국제 정세와 신라의 삼국통일 전략 : 특집논문 ; 수(隋),당(唐)의 제국주의와 신라 외교의 묘체(妙諦) -고구려는 왜 멸망했는가?」,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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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高句麗, 百濟, 新羅. [본문으로]
  2. 581∼618. 양견(楊堅:文帝)이 581년 북주(北周)의 정제(靜帝)로부터 양위 받아 나라를 개창하고, 589년 남조(南朝)인 진(陳)을 멸망시켜 중국의 통일왕조를 이룩하였다. 문제·양제(煬帝:廣)·공제(恭帝:侑)의 3대 38년이라는 단명 왕조였으나, 남북으로 갈라져 있던 중국을 오랜만에 하나의 판도에 넣어 진(秦)·한(漢)의 고대 통일국가를 재현하였고, 뒤를 이은 당(唐)이 중국의 판도를 더욱 넓혀 대통일을 이룩하는 데 기반이 되었다는 점에서 존립의의가 크다. [본문으로]
  3. 618년 이연(李淵)이 건국하여 907년 애제(哀帝) 때 후량(後梁) 주전충(朱全忠)에게 멸망하기까지 290년간 20대의 황제에 의하여 통치되었다. 중국의 통일제국(統一帝國)으로는 한(漢)나라에 이어 제2의 최성기(最盛期)를 이루어, 당에서 발달한 문물(文物) 및 정비된 제도는 한국을 비롯하여 동(東)아시아 여러 나라에 많은 영향을 끼쳐 그 주변 민족이 정치 ·문화적으로 성장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한국의 경우 삼국체제(三國體制)가 붕괴되고 정치세력 판도가 크게 바뀌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본문으로]
  4. 6세기 중엽 알타이 산맥 부근에서 일어나 약 2세기 동안 몽골 고원에서 중앙아시아에 걸친 지역을 지배한 터키계 유목 민족. [본문으로]
  5. 중국 내를 통일한 수ㆍ당에게 있어 남은 직접적인 큰 위협은 돌궐과 고구려였다. 특히 이 둘이 동맹관계를 강화하는 것은 동아시아 지역의 힘의 역학관계가 긴장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는 것으로서, 수ㆍ당은 이 둘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중국의 역사에서 유목민족이 하나로 힘을 합치는 일은 언제나 안보의 가장 큰 문제였고, 강대한 유목민족이 동북지역의 실력자로 떠오른 고구려와 손을 잡는 것은 국가의 위기였다. [본문으로]
  6. 백제의 멸망 : 660, 고구려의 멸망 : 668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삼국의 통일이다. 그러나 백제와 고구려 멸망 이후의 역사적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당은 만주와 한반도를 자신의 지배적 위치아래 두기를 원했고, 신라는 이에 대항해 당과 전쟁을 벌여 당의 세력을 몰아낸다. 이 과정에서 신라는 고구려의 영역을 제외한 백제의 영역 정도만을 점유하는데 그치게 되었고, 이는 현재까지 신라의 삼국통일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삼국통일인지에 대한 논란의 씨앗이 되고 있다. 하지만 본고에서는 이러한 논란에 대한 언급은 피하고 결국 삼국 중에 신라가 살아남아 승자가 되었는지에 대해 서술하도록 하겠다. [본문으로]
  7. 한자를 사용하며 중국식 율령(律令) 등을 받아들여 각국의 사정에 맞게 사용. 이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 다양한 방면에서 동질성을 보이는 중화문화권의 국가로는 현재, 중국ㆍ한국ㆍ일본ㆍ베트남 이 있다. [본문으로]
  8. 수나라의 초대 황제(재위 581~604). 581년 수나라를 세웠다. ‘개황율령’을 제정, 과거제 등 중앙집권제를 강화했다. 당나라 율령의 기초를 세웠다. 589년 남조의 진을 평정, 남북조를 통일했다. [본문으로]
  9. 남조(南朝) 최후의 왕조(557∼589). 무장 진패선(陳覇先, 武帝:재위 557∼559)이 557년 양(梁)나라를 멸하고 건국하였다. 589년 수(隋)나라에게 멸망당하였다. [본문으로]
  10. 몽골 지방에 자리 잡고 살던 고대의 유목 민족. 중국 동진(東晉) 초기에, 선비족에 예속되었다가 5세기 초에는 그 옛 땅을 차지하였으며 돌궐에 멸망하였다. [본문으로]
  11. 우문호(宇文護)가 세운 중국 북조(北朝)의 왕조(557∼581). 서위(西魏)의 실권가인 우문태(宇文泰)가 죽고 아들 우문각(宇文覺)이 뒤를 이었을 때, 그를 보좌한 우문각의 사촌 우문호가 서위의 공제(恭帝)를 제위에서 밀어내고 이 왕조를 세웠다. 서위(西魏)시대부터 고대의 '주(周)'를 본받았기 때문에 명칭을 북주라 하였는데, 북위(北魏)의 효문제(孝文帝) 이래로 한화(漢化)주의·문벌(文閥)주의를 배척하고 북족존중(北族尊重)주의를 취하였으며, 소박(素朴)주의 정치를 지향하였다. [본문으로]
  12. 동위(東魏)의 실권자 고양(高洋:高歡의 아들)이 세운 중국의 왕조(550∼577). 남제(南齊)와 구별하여 북제라고 한다. 꼭두각시 황제인 효정제(孝靜帝)를 밀어내고 동위의 영토를 그대로 인수, 국호를 제(齊)라 하고 도읍을 업(鄴)에 정하였다. 경쟁국인 서위(西魏)·북주(北周)에 비하여 인재도 많았고 물자도 풍부하였지만, 결국은 북주에게 멸망되었다. [본문으로]
  13. 고구려 제25대 왕(재위 559∼590). 중국의 진(陳) ·수(隋) ·북제(北齊) ·후주(後周) 등 여러 나라와 수교하였다. 일찍이 장수왕(長壽王)이 평양의 북동쪽 대성산성(大城山城)으로 국도를 옮긴 뒤 양원왕이 장안성(長安城:평양)에 대규모의 축성 공사를 시작한 것을 완성시켜 장안성으로 천도하였다. [본문으로]
  14. 고구려 제26대 왕(재위 590∼618). 즉위 후 수(隋)나라와 화친을 꾀하다가 598년 말갈(靺鞨) 군사 1만을 이끌고 요서(遼西)를 선공(先攻), 전략적 요충 확보에 나섰다. 이에 수나라 문제(文帝)가 30만 대군으로 침공하였으나 이를 격퇴시키고, 600년 태학(太學)박사 이문진(李文眞)에게 명하여 《유기(留記)》 100권을 재편수, 《신집(新集)》 5권을 만들게 하였다. 608년 신라의 변경을 습격, 우명산성(牛鳴山城)을 함락하고 군사 8,000을 포로로 잡았다. 610년에는 일본에 승려 담징(曇徵)과 법정(法定) 등을 보내 종이, 먹 등의 기술을 전하였고 담징은 일본 호류사[法隆寺] 금당 내부의 벽화를 그렸다. 612년 수나라 양제(煬帝)가 문제의 패전을 설욕하고자 113만 수륙군(水陸軍)으로 쳐들어오자,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을 시켜 살수(薩水)에서 적을 섬멸하고 그 뒤에도 계속 침공군을 무찔러 수나라 멸망의 요인이 되게 하였다. [본문으로]
  15. 중국 수(隋)나라의 제2대 황제(재위 604∼618). 만리장성을 수축하고 대운하를 완성하였다. 3차례 고구려를 침입하였으나 대패하였고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나 수나라가 멸망에 이르게 하였다. [본문으로]
  16. 일본 나라[奈良]시대에 관찬(官撰)으로 이루어진 일본의 역사서. 680년경 착수, 720년에 완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일본 6국사(六國史) 중의 첫째로 꼽히는 정사(正史)로서 왕실을 중심으로 하여 순한문의 편년체(編年體)로 엮었으며, 편찬의 자료로는 제기(帝紀), 구사(舊辭), 제가(諸家)의 전승기록(傳承記錄), 정부의 공식기록, 개인의 수기(手記), 사원(寺院)의 내력 등을 기초로 하고, 특히 《백제기(百濟記)》 《백제본기(百濟本記)》 《백제신찬(百濟新撰)》 등 한국의 사료(史料)와 《위서(魏書)》 《진서(晉書)》 등 중국의 사서(史書)를 병용하고 있어, 일본에서 비교적 객관적으로 저술한 역사서라고 자부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 서술된 한국과의 관계는 왜곡된 부분이 많아, 진구황후[神功皇后]가 신라를 정복하였다는 터무니없는 대목이 있고, 또 연대(年代)도 백제의 기년(紀年)과는 약 120년의 차이가 있어, 이주갑인상(二周甲引上) 사실이 드러나 한국 학자 중에는 사서(史書)가 아니라 사서(詐書)라고 평하는 이도 있다. [본문으로]
  17. 고구려의 승려로 일본의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되었으며, 백제 승려인 혜총과 호코사[法興寺]에서 포교에 힘쓰다 615년 고구려로 돌아왔다. 《일본서기(日本書紀)》 등의 기록에 따르면, 혜자(惠慈)는 595년(영양왕 6년) 일본으로 건너가 최초의 여자 천황(天皇)인 스이코 천황(推古天皇)의 섭정(攝政)이었던 쇼토쿠[聖德, 574?~622]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그리고 쇼토쿠 태자가 중앙 집권 체제를 정비하고, 불교를 융성케 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본문으로]
  18. 선비족의 일부가 장성지대(長城地帶)로부터 이동하여 티베트계의 현지인을 제압하고 세운 나라로 왕을 가한(可汗)이라 일컬었고 가한 중심으로 유목생활을 하였다. 동시에 현지인 일부는 강가나 골짜기에서 농경생활을 영위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목되는 것은 이 나라가 동서간의 국제무역 중계를 생명으로 하는 상업도시의 성격을 강하게 나타낸 점인데, 그 때문에 서쪽 타림분지에는 이를 위한 기지가 설치되었고, 북방의 유목민 국가인 유연(柔然)이나 남방 티베트가 세운 여국(女國)과의 교섭도 활발하였으며, 동방으로는 중국의 북조(北朝)와 남조(南朝)와도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635년 당(唐)나라에 항복하여 예속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663년 티베트의 토번(吐蕃)에게 멸망당하였다. [본문으로]
  19. Chulo, 處羅(처라), 재위 619~621 [본문으로]
  20. http://blog.naver.com/maenam111?Redirect=Log&logNo=90043597423 (이해를 돕는 자료) 본래 본고를 처음 작성했을 때에는 없던 각주였으나, 블로그에 옮기는 과정에서 읽으면 도움이 될 것 같아 남깁니다. 인터넷이 갖는 장점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라 좋군요. 앞으로 좀 더 이런 방식을 고민하겠습니다. [본문으로]
  21. 중국 수나라 양제 때인 608년에 허베이지구[河北地區] 군사운수(軍事運輸)의 수로로 최초로 개통된 운하로 길이는 2,000km 정도이다. 송(宋)나라 때부터는 위허[御河]라고 불렀으나 명(明)나라 때부터 웨이허[衛河]라고 부른다. [본문으로]
  22. 以夷制夷 : 오랑캐로 오랑캐를 무찌른다는 뜻으로, 한 세력을 이용하여 다른 세력을 제어함을 이르는 말 [본문으로]
  23. 唐高祖. 당의 초대황제. [본문으로]
  24. 중국 산시성[山西省]의 성도(省都). 펀허강[汾河] 상류의 동쪽과 서쪽이 타이항[太行]산맥·뤼량[呂梁]산맥에 둘러싸인 분지에 위치한다. [본문으로]
  25. Sibir Khagan : 始畢可汗, 609∼619 [본문으로]
  26. 唐太宗. 당으 2대 황제. 중국 역대 황제 중 최고의 성군으로 불리어 청나라의 강희제와도 줄곧 비교된다. 그가 다스린 시대를 정관의 치라 했다. [본문으로]
  27. 626년 7월 2일에 발생한 당 고조 이연(李淵)의 후계자를 두고 장남 이건성(李建成)과 차남 이세민(李世民)의 다툼이다. 이에 승리한 차남 이세민이 제2대 황제인 당 태종으로 즉위하였다. [본문으로]
  28. 중국 당(唐)의 장군으로 고구려 정벌에 공을 세웠을 뿐 아니라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의 도호(都護)로서 한반도 침략 정책을 총지휘하였다. [본문으로]
  29. 7세기 초에서 9세기 중엽까지 활동한 티베트왕국 및 티베트인(人)에 대한 당(唐) ·송(宋)나라 때의 호칭. [본문으로]
  30. 수나라 때에 알타이산맥의 서남에 자리잡고 서돌궐(西突厥)에 복속되어 있었으나 605년에 다른 철륵 부족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켜 독립하였다. 약 10년 후에 다시 강성해진 서돌궐에게 복속되었으나 627년에 부족장 이남(夷男)이 부족을 이끌고 셀렝가강(江) 방면으로 이동하여 위구르와 결탁하고 동돌궐의 북변으로 침입하였다. 630년에는 당군(唐軍)과 협력하여 동돌궐을 와해시키고 몽골고원을 지배하였으나 이남이 죽은 뒤 분열하여 국세가 쇠퇴하였다. 646년 당군의 토벌로 멸망하여 당의 간접지배를 받았다. [본문으로]
  31. 중국 당(唐)나라 때 동(東)투르키스탄 및 그 서방의 무역로를 관할하기 위해 설치한 도호부. [본문으로]
  32. 고구려 멸망 후, 당(唐)나라가 고구려의 옛 땅에 둔 최고 군정기관(軍政機關). [본문으로]
  33. 백제 제30대 왕(재위 600∼641). 신라와 자주 충돌했고, 고구려 남진을 견제했다. 수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친당책을 썼다. 일본에 서적, 불교를 전달했다. [본문으로]
  34. 백제의 제31대 왕(재위 641∼660). 재위 초기에는 친히 신라를 공격하여 신라에 큰 타격을 주고 국위의 만회에 힘썼으나, 만년에는 사치와 향락에 빠져 나 ·당 연합군의 침공을 맞았으며, 끝내 항복하였다. [본문으로]
  35. 고구려의 제27대 왕(재위 618∼642). 동북쪽의 부여성으로부터 동남쪽 바다에 이르는 천리장성의 축조를 시작, 연개소문에게 역사(役事)의 감독을 맡겼으나 그의 반역으로 살해되었다. [본문으로]
  36. 고구려 때에, 전사자의 유해를 한곳에 모아 장사 지내고, 전공(戰功)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합동 무덤. [본문으로]
  37.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진저우[金州] 유이향[友誼鄕] 동쪽의 대흑산(大黑山)에 있는 고구려 때의 산성. [본문으로]
  38. 고구려 동부(東部) 출신이라고도 하며 서부(西部) 출신이라고도 하는데, 어느 쪽이 맞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름이 개소문(蓋蘇文), 개금(蓋金), 개금(盖金), 이리가수미(伊梨枷須彌) 등 기록마다 다양하게 표기되었으며, 성씨도 연(淵), 천(泉), 전(錢) 등으로 표기되었다. 본래 연씨이지만 당나라 고조(高祖) 이연(李淵)의 이름을 피해 뜻이 같은 천(泉)자로 바꿨다고 보는 것이 보통이다. 소문(蘇文)을 직명(職名)으로 보는 설, 연개(淵蓋)를 성으로 보는 설 등이 있지만 최근에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한편, 연개소문은 외교정책을 대당강경책(對唐强硬策)으로 이끌었다. 고구려는 수(隋)나라의 중국 통일 이후 침입에 대비하였다. 그리하여 영양왕 때에는 수나라가 침입하려 하자 오히려 먼저 공격하는 강경책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당나라가 건국한 뒤에는 영류왕 때 온건책을 펴고 있었다. 그런데 연개소문이 집권하면서 고구려의 외교정책이 강경책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변화를 신 구 귀족 사이의 갈등과 연관시키기도 한다. 흔히 구귀족은 대외 온건파, 신귀족은 대외 강경파로 보는데, 이들 중 누가 집권하느냐에 따라 대외 정책이 변한다는 것이다. 연개소문은 신귀족 세력으로 분류된다. [본문으로]
  39. 당시 인구가 10만 명 정도였던 고구려 영지로, 고구려가 요하(遼河)유역에 설치하였던 방어성들 가운데 전략적으로 요동성(遼東城) 다음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본문으로]
  40. 진흥왕 [眞興王, 534~576]. 신라 제24대 왕(재위 540∼576). 백제 점령하의 한강 유역 요지를 획득하고, 백제 성왕을 사로잡아 죽였다. 이어 대가야를 평정하고, 새로 개척한 땅에 순수비를 세웠다. 화랑제도를 창시하는 등 군사적 ·문화적으로 실력을 길러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았다. [본문으로]
  41. 관산성 전투는 554년 백제와 신라가 관산성(지금의 충북 옥천)에서 싸워 신라군이 백제군은 무찌르고 백제 성왕을 죽인 전투이다. 신라와 백제가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대항하여 동맹관계를 유지하다가 신라가 나제동맹을 깨고 백제의 영토인 한강유역을 점령하였다. 이것이 산성전투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554년(신라 진흥왕 15) 백제는 일본에 원군을 청하고, 대가야와 연합하여 신라의 관산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백제는 크게 패배하여 성왕(聖王)은 전사하였다. 관산성이 양군의 결전장이 된 것은 이 지역이 신라로서는 새로 점령한 한강하류지역을 연결시켜주는 전략적 요지이기 때문이다. 그뒤 양국관계는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적대관계가 계속되었다. 관산성의 위치는 백제 성왕사절지(聖王死節地)로 전해지는 충청북도 옥천군 군서면 월전리 9-3번지 부근과 이곳에서 맞은 편 서북쪽으로 약 800m 떨어져 있는 지역으로 추정하고 있다. [본문으로]
  42. 삼국시대에 신라와 백제가 고구려의 남진(南進)을 막기 위해 체결한 동맹. [본문으로]
  43. 진평왕 [眞平王, ?~632]. 진흥왕의 손자. 신라 제26대 왕(재위 579∼632). 여러 차례에 걸친 고구려의 침공에 대항, 수(隋)나라, 당(唐)나라와 수교하여 고구려의 침공을 꾀했다. 관청을 신설하고 내정의 충실을 도모하였으며, 불교를 진흥시켰다. [본문으로]
  44. 삼한(三韓)시대에는 변한(弁韓)에 속한 땅으로, 다라(多羅) ·초팔혜(草八兮) ·산반계(散半溪) 등의 부족국가들이 형성되었는데, 후에 대가야(大伽耶)에 흡수되었다. 신라의 장군 이사부(伊斯夫)가 562년(진흥왕 23)에 이 일대를 공략, 신라에 종속시키고 대량주(大良州)로 개칭하였다. 이 지역이 서쪽 백제와의 접속지로서 군사적 요충지였으므로, 신라는 이곳에 도독부(都督府)를 두고 경계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642년(선덕여왕 11) 백제 장군 윤충(允忠)의 침공으로 함락되었다. 이에 큰 타격을 입은 신라는 고구려에 원병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본문으로]
  45. 선덕여왕 [善德女王, ?~647]. 638년 10월에 고구려가 칠중성(七重城)을 공격해 오자 11월에 이를 격퇴하였으며, 642년에는 백제의 의자왕에게 미후성 등 40여 성을 빼앗겼다. 이어 백제가 고구려와 모의하여 당항성(唐項城)을 빼앗아 나당(羅唐)의 통로를 끊어버리자 여왕은 이 사실을 당나라에 호소하였으며 이어서 백제에게 대야성(大耶城)이 함락되자 김춘추(金春秋)를 고구려에 보내어 구원을 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643년에 다시 고구려 ·백제의 침입을 당나라에 호소하고 원군을 간청하였으며 이듬해 김유신(金庾信)으로 하여금 백제에게 빼앗긴 성을 회복하게 하였다. 645년에 당태종이 고구려에 원정하자 원군을 보냈으나 다시 백제에게 서변 7성을 빼앗겼으며, 647년에 비담(毗曇) ·염종(廉宗) 등이 여왕의 무능을 구실로 모반하였으나 곧 진압했지만 이 해에 여왕은 신병으로 죽어, 유언에 의해 낭산(狼山)에 장사지냈다. 여왕은 내정에서는 선정(善政)을 베풀어 민생을 향상시켰고 구휼사업에 힘썼으며 당나라의 문화를 수입하였다. 자장법사(慈藏法師)를 당에 보내어 불법을 수입하였으며, 첨성대(瞻星臺) ·황룡사 구층탑(皇龍寺九層塔)을 건립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본문으로]
  46. 후의 태종무열왕 [太宗武烈王, 604~661]. 신라 제29대 왕으로 김유신 등에게 5만의 군사를 주고 당나라 군사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당의 율령제도를 모방한 관료체계를 정비하고 구서당이라는 9개 군단(軍團)의 설치하는 등 왕권을 확립하였다. 642년(선덕여왕 11) 백제의 침입으로 대야성(大耶城)이 함락되고 사위인 성주(城主) 품석(品釋)이 죽음을 당하자, 고구려와 힘을 합하여 백제를 치고자 연개소문(淵蓋蘇文)을 만났으나, 국경의 영토문제로 감금당했다가 돌아왔다. 웅변에 능하고 외교적 수완이 뛰어나서 사신으로 일본과 당(唐)나라에 다녀왔으며, 특히 당나라에는 여러 차례 왕래하면서 외교적 성과를 거두고 군사원조까지 약속받아 삼국통일의 토대를 닦았다. [본문으로]
  47.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구봉산(九峰山) 위에 있는 삼국시대의 석축 산성. [본문으로]
  48. 신라의 제30대 왕(재위 661∼681). 태종무열왕의 맏아들. 나·당연합군으로 660년 백제,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676년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고 삼국통일을 완수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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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書論

Ⅱ. 本論
 Ⅱ-1. 가톨릭교회의 발전
 Ⅱ-2. 로마 교회와 프랑크 왕국(Frankenreich, 481~843)의 제휴
 Ⅱ-3. 교권과 세속권의 대립
 Ⅱ-4. 서임권 투쟁과 카노사의 굴욕(Humiliation at Canossa)
 Ⅱ-5. 교황권의 몰락

Ⅲ. 結論



김 솔

 


Ⅰ. 서론


서양 중세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봉건제도(封建制度, feudalism)와 가톨릭교회[각주:1]를 연구한다. 하지만 이 둘은 완전히 분리되어 물질세계와 관념세계 각각을 관장하지는 않는다. 서로 상호 연관성을 가지면서 중세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고대 로마 제국이 분열, 해체되면서 통일적인 지중해 세계가 붕괴되어 무질서와 혼란의 상태가 계속된 유럽 사회는 새로운 변혁을 모색해야만 했었다. 이에 따라 유럽에서는 정부의 기능, 군사적 책임, 토지 소유를 조합시킨 보편적인 제도로 봉건제도가 등장하게 되었다. 한편 봉건제도와 함께 중세사회를 정신적으로 지배한 것은 가톨릭교회였다. 가톨릭교회의 우두머리는 교황으로 그 지위는 고대 제국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타격을 받지 않고, 오히려 로마적 전통의 계승자로서 위세가 한층 높아졌다. 이러한 가톨릭교회의 발전에 중대한 계기가 된 것은 프랑크 왕국과의 제휴였다. 프랑크 왕국의 역대 왕들은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교회 발전에 노력하였다. 그 후 가톨릭교회는 이교도의 개종, 이단의 극복, 교회 조직의 정비 등에 주력하였고, 역대 교황들이 이러한 교회의 쇄신에 진력한 결과, 유럽 전역은 가톨릭교화 되었다. 기독교는 중세인의 생활양식은 물론이고 철학, 문학과 예술 등 광범위한 분야에 그 영향력을 행사했다. 따라서 중세 문화는 기독교의 교리와 가치관에 지배된 문화였다.

본고에서는 이 중 중세 유럽인들의 정신과 사상을 지배하며 그들의 생활과 밀접한 연관을 맺었던 중세 가톨릭교회의 발전과 변화를 살펴봄으로써 중세 유럽인들의 모습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Ⅱ. 본론


가톨릭교회는 서양 중세를 통하여 교리와 신학, 조직과 예배 의식을 확립하였고, 봉건제도하의 정치 및 경제 분야에 있어서도 세속적 권위를 장악하였다. 물론 이러한 세속적 권위의 장악에는 세속 군주에 대한 황제 지위의 인정과 대관을 통해 군주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은 것도 있었다. 비대해진 교권과 세속권의 대립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궁극적으로는 교황의 세력이 세속군주의 세력에 대해 우월성을 갖게 되었으며, 전 유럽은 십자군 운동과 같은 기독교의 명분에 복종하게 된다.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은 사회 이론과 세계관의 확립에도 작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세인의 경제 활동과 사회 신분의 유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중세의 학문과 교육은 성직자들의 수중에 장악되어 그 방향과 내용이 결정되었다. 또한 문학과 예술은 기독교의 이념에 맞는 내용과 주제를 채택하였으며, 모든 지적 활동은 신학적 기초가 된 스콜라 철학의 영향 하에 놓이게 된다. 중세 말 가치관의 변화와 정치ㆍ경제ㆍ사회 등 다방면에 걸친 변화가 가톨릭교회의 존립 기반을 뒤흔들어 놓을 때까지 가톨릭교회의 보편적인 권위는 세속적 질서에 있어서나 도덕적 질서에 있어 확고부동하였다.



Ⅱ-1. 가톨릭교회의 발전


기독교의 성립 초기에는 제도화된 조직도 뚜렷한 교리도 정립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신도의 수가 크게 증가하고 교세가 확장되자 5세기 중엽부터 로마 제국의 통치 조직을 모방한 교회제도가 발달하게 되었다.

로마 시대에는 로마, 콘스탄티노플, 안티오크,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에 5대 관구가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유력한 것은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교회였다. 특히 로마 교회는 12사도 중 최연장자이며 지도자였던 베드로가 창건한 교회로 전체 교회의 중심세력이 되었다. 이것은 당시 로마가 정치와 행정의 중심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로마에서 다수의 순교자가 나와 기독교가 크게 전파되었다는 신앙적 근거가 로마를 기독교의 중심이 되게 하였다. 이것이 로마가 교황청이 된 주된 이유였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로마와 그 부근의 정치는 자연히 로마 교회의 영향 하에 이민족의 침입으로 생긴 혼란기의 치안 유지에 이바지하여 민중의 신망을 받았다. 로마 교회는 다시 게르만 민족의 개종에 착수하여 프랑크 왕국과 제휴하여 서유럽 일대에 기독교를 전파하고, 프랑크의 원조에 의하여 교황령을 설치하여 세력을 더욱 강화하였다. 그리하여 로마의 주교를 교황이라 불렀으며, 교황이 서방 기독교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Ⅱ-2. 로마 교회와 프랑크 왕국(Frankenreich, 481~843)의 제휴


동로마의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각주:2]가 이탈리아와 아프리카의 동고트족(Ostrogoths)과 반달족(Vandals)을 격멸하고, 아랍인이 에스파냐의 서고트(Visigoth Kingdom) 왕국을 제거하자, 갈리아의 프랑크족 지배자들은 서유럽에서 살아남은 중요한 게르만 세력이 되었다.

프랑크 왕국의 건설자는 클로비스(Clovis)[각주:3]였다. 그는 500년경에 오늘날의 프랑스와 벨기에 지역을 대부분 정복하고, 당시 그 지역의 주교 및 주민들이 믿고 있던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각주:4] 클로비스는 메로빙거 왕조[각주:5]를 창시했다.

그러나 클로비스는 통합된 영토를 적장자에게 상속하지 않고, 게르만족 상속방식에 따라 아들들에게 왕국을 분할 상속 하였다. 그 후 200년간 그의 자손들은 계속된 세력 다툼을 벌이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카들을 제거하고 단독 정권을 수립하는데 성공한 클로타르 2세(ChlotharⅡ)는 정권 수립 과정에서 도움을 받은 게르만 부족장에게 특권을 부여한다. 클로타르의 칙령(Edictum Chlothar)이 그것이다. 그 결과 봉건 제후들의 권한이 매우 강해지게 되었다.[각주:6] 급기야 세 명의 궁재(宮宰, majordomus) 중 아우스트라시아(Austrasia)[각주:7]의 궁재직을 대대로 세습한 카롤링거가(家)가 네우스트리아(Neustria)[각주:8]-부르군트(Burgund) 궁재 연합군을 Tentry전투(687)에서 제압하고 홀로 궁재의 자리에 남는다.[각주:9] 이후 751년 카롤링거가문의 피핀(PippinⅢ, 751-768)은 쿠데타를 단행하여 메로빙거가 최후의 왕 힐데리히(ChilderichⅢ)를 왕위에서 축출하고 왕이 되었다. 이로써 피핀은 새로운 왕조인 카롤링거왕조(Carolingian dynasty)[각주:10]를 창설하게 되었다.

피핀이 이 새로운 왕조를 창설하는 데에는 교황이 결정적으로 기여를 하였다.[각주:11] 쿠데타를 단행하기에 앞서 피핀은 교황 자카리아스(Zacharias, 741-752)의 지원을 요청하였고, 교황은 이 요청을 수락하였다. 이로 인해 로마교회와 프랑크왕국이 긴밀하게 제휴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마련되었다.

교황의 승인에 힘입어 751년 피핀은 프랑크인들의 관습에 따라 왕으로 선출되었다.

피핀의 왕위즉위를 계기로 크게 발전된 교황권과 프랑크 왕국의 우호적 관계는 교황 스테파누스2세(StephanusⅡ, 752-757)가 그의 전임자인 자카리아스를 계승한 이후 더욱 진전되었다. 롬바르드(Lombard)인들의 침입에 직면하여 한편으로는 롬바르드왕과 협상을 시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비잔틴 제국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등[각주:12] 여러 가지 외교적 노력을 동원했으나 다른 대안이 없자 스테파누스는 피핀에게 도움을 호소하기로 작정한다. 피핀은 이 요청에 응하는데, 그 이유는 그의 왕권이 교황에게 호소함으로써 확보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교황권이 롬바르드인들의 지배하에 들어가면 그의 왕권은 크게 손상될 것이며 반대로 그가 교황권을 효과적으로 보호하고 롬바르드인들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면 그의 유약한 왕권은 크게 고양될 것이었다. 이후 754년과 756년, 두 차례에 걸쳐 피핀은 이탈리아로 원정하였고, 롬바르디아족의 정복지를 교황령으로 로마 교황에게 주었다. 이에 로마 교황은 로마인들의 보호자(Patricius Romanorum)의 칭호를 부여함과 동시에 프랑크인들에게 피핀가문 이외의 다른 어느 가문출신의 왕도 선택하지 못하게 하였다. 도유식(塗油式)[각주:13]과 더불어 피핀의 왕위를 강화시켜주는 이러한 조치는 피핀이 간절히 원하는 바였다.

이후 신성한 기독교 왕의 지배하에 있는 프랑크 왕국 내에서 정치와 종교 간의 긴밀한 연계가 이루어졌다. 메로빙거 시대에 종교회의는 왕의 권위와는 별개로 개최되었다. 종교회의 강령도 왕의 강령과는 별개로 시행되었다. 그러나 카롤링거왕조가 들어선 이후 종교회의는 왕의 통치와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왕 자신이 백성들의 이익을 위하여 왕의 이름으로 종교회의를 소집하였다. 왕이 소집하는 종교회의 참석자들은 성직자는 물론 속인도 포함되었다. 여기에서 수도원 규칙, 성직자의 의상, 성직의 면직, 퇴폐행위 등 온갖 종류의 교회문제들이 결정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종교회의는 하나의 통치기구였다. 종교회의 강령과 왕의 강령은 하나로 연결되었다. 프랑크 왕국에서 종교회의 강령은 곧 왕의 강령들로 선포되었다.

신성한 군주의 지위에 오른 프랑크 왕들의 통치하에서 대외적으로도 기독교가 널리 보급될 수 있는 전기가 마련되었다. 신의 은총을 입어 프랑크 왕이 된 피핀은 동시에 기독교 왕으로서 교회를 수호하고 신앙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띠게 되었다. 피핀은 이교도들을 상대로 활기차게 정복전쟁을 수행하였다. 피핀이 교황의 도움을 받아 왕이 된 이후의 피핀의 정복전쟁은 곧 이교도에 대한 퇴치요 기독교의 보급을 위한 전쟁이었다. 즉 교황이 원하는 교회의 수호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던 것이다. 프랑크인들은 향후 유럽이 기독교 사회가 될 수 있도록 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이것이 교회와 프랑크 왕국 간에 제휴가 지니는 큰 의미이다. 또한 이 제휴가 지니는 가장 직접적이고도 중요한 의미는 이를 계기로 서유럽 중세사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인 교황이 주도하는 기독교 공동체가 수립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는 점이다.[각주:14] 교황이 비잔티움 황제의 총독과 같은 지위에서 벗어나 기독교 세계에서 완전한 독립된 군주로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확실한 보호자를 얻을 때만이 가능한 것이었다. 당시 유럽 세계에서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하는 세력인 프랑크 왕국과 제휴를 함으로써 교황은 당장 롬바르드인들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고, 동시에 비잔티움 황제의 황제교황주의의 압렵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교황의 입장을 지지하고 후원하는 확실한 보호자를 세워 그 동안 집요하게 추구해 오던 기독교 세계에서의 최고 지배권을 획득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Ⅱ-3. 교권과 세속권의 대립


피핀 이후 프랑크 왕국의 왕이 된 자는 샤를마뉴 대제(Charlemagne)[각주:15]였다. 샤를마뉴 생의 절정기는 800년이었다. 이 해 크리스마스에 그는 교황에 의해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대관됐던 것이다. 이 사건의 분명한 사실은 샤를마뉴가 황제의 칭호를 얻음으로써 무슨 실질적인 새로운 권력을 얻게 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프랑크 왕국은 이탈리아를 지배하자마자 교황권과 교회 전체를 장악하게 되었고, 그 결과 800년경에 이르러 교황은 왕의 특별한 신하일 뿐 다른 봉건제후와 크게 다를 바 없는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의 의의는 무척 크다. 800년경에 이르기까지 황제라고는 유일하게 콘스탄티노플에 한 명 있었을 뿐이고, 그만이 아우구스투스(Augustus)의 직계 후계자임을 주장할 수 있었다. 또한 비잔틴은 비록 서유럽에 대한 관심을 잃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서유럽을 막연하게나마 제국의 변방 정도로만 간주하고 있었던 터라 서유럽인 가운데 누군가가 스스로를 황제로 부르는데 대해 극력 반대했다.

샤를마뉴의 황제 대관은 사실상 서유럽인의 자신감과 독립성을 내외에 천명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샤를마뉴의 황제 대관은 거대한 서유럽 문화 형성을 향한 중요한 이정표였다.[각주:16]


샤를마뉴 이후 프랑크 왕국은 셋으로 분열된다. 분열 이후 서로마 제국 황제의 관은 동프랑크 왕국의 오토 대제(Otto I, 912.11.23~973.5.7)[각주:17]에게로 전해진다. 당시 교황이었던 요한 12세(Joannes XII, 938?-964)[각주:18]가 962년 오토를 보호자로 요청하고 그 대가로 황제의 관을 씌운 것이다.[각주:19] 이에 따라 신성로마제국(Heiliges Römisches Reich)[각주:20]이 탄생된다. 당시 오토는 황제가 되는 조건으로(보호를 해주는 조건으로) 로마교회는 황제의 의사에 반대하는 교황을 세울 수 없다는 것과 서임권[각주:21]은 황제에게 있다는 것을 내새웠다. 이는 여전히 교황권에 비해 황제권(세속권)이 그 우위에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실제로 요한 12세는 오토에 의해 교황 직위에서 파면되었다.

한편 오토는 정복지에 봉건 제후를 임명하는 대신 세습이 되지 않고, 황제권에 의해 교체가 가능한 성직자인 주교ㆍ대주교를 임명하여 영토를 통치하기 시작한다. 이로 인해 교회의 크기는 더욱 커지게 되었고, 이후 교황권과 충돌할 때 문제가 될 소지를 남기게 된다.

이후 하인리히 3세(Heinrich III)[각주:22] 까지 황제권은 교황권에 그 절대적 우위를 다지고 있게 된다. 하지만 하인리히 3세의 아들인 하인리히 4세(Heinrich IV)[각주:23]에 이르면 이러한 사정은 점차 변화하기 시작한다. 교황이 황제의 권력에 대항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는 황제와의 결정적 차이에서 기인한다.

중세 로마 교회는 수장인 교황으로부터 하위 성직자에 이르기까지 상하의 계급 구조를 이루어 웅대한 제도적 조직을 형성하고 있었다. 각 지방의 주교와 수도원은 왕과 귀족들로부터 토지를 받아 광대한 영지를 지배하는 봉건 영주가 되었다. 특히 교황청은 직할지인 교황령에서 나오는 수입 이외에도 신자들의 기증과 로마시에서 거두어들이는 세금 등으로 다른 세속 국왕과 제후를 능가하는 유럽 제 1의 재력가가 되었다. 또한 로마 제국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켜 고도의 관료 기구도 가지고 있었으므로 권력이 분열되어 있는 국왕이나 제후들에 대하여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교회는 신의 대리자로서 봉건 제후의 전쟁에도 간섭하였고, 모든 세속적인 일에도 교회의 재판은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각주:24]

이렇게 교황의 세속적 권력이 강대해지자 지상의 최고 권력자인 황제에게 도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황제 하인리히 4세에 도전한 교황은 그리고리우스 7세(Gregorius VII)[각주:25]였다.



Ⅱ-4. 서임권 투쟁과 카노사의 굴욕(Humiliation at Canossa)


로마에서 교회개혁운동에 앞장서고 있던 클뤼니 수도원[각주:26]에서 교육을 받았던 그레고리우스 7세는 성직자들에게 절대적인 순결과 복종을 요구함과 동시에 국왕과 황제에 대한 교황의 우위를 주장했다. 즉 국왕과 황제는 교황의 명에 복종하여 세상을 개혁하고 복음화 하는 일에 기여해야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그레고리우스는 세속 군주들이 순수 세속적인 문제에 관해서만 지배권과 결정권을 계속 보유해도 좋다고 허용했다. 말하자면 선임 개혁 교황들이 교황권과 세속권의 이원성만을 추구했던 데 반해, 그레고리우스 7세는 교(敎)ㆍ속(俗) 두 영역을 모두 지배하는 교황 군주 국가를 창출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레고리우스의 교황으로서의 활동은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재위 초기부터 그는 세속 지배자가 성직자의 직무를 수여하던 의식을 반대하는 법령을 시행하기로 결정했다. 황제 하인리히 4세는 이에 반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야기된 투쟁은 서임권 문제가 중심이었으므로 통상 “서임권 투쟁”으로 불리지만, 그것은 실제로는 교황과 황제 둘 중 누가 더 강력한 권위와 힘을 갖는지를 겨룬 투쟁이었다.

1076년 1월 하인리히 4세는 보름스에서 제국의회를 소집,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를 폐위한다는 결의문을 통과시켰다. 그러자 이번엔 분노한 교황이 하인리히 4세를 파문에 처하였다. 파문은 가톨릭 세계로부터 완전 추방을 의미하는 것으로 매우 치명적인 조치였다. 한편 그레고리우스는 여타 다른 제후들과 동맹을 구축함으로써 하인리히로 하여금 수세에 몰리도록 했다. 때마침 제후들은 황제의 지배권에 반항할 구실만을 찾고 있던 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황의 파문은 제후들에게 좋은 명분을 제공해주었고, 제후들이 하인리히의 교황에 대한 불복종을 이유로 황제의 폐위를 요구하자, 막강했던 황제는 그레고리우스 7세의 사면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될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

교황은 당시 토스카나 백작 부인 마틸다(Matilda)의 카노사 성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1077년 한겨울에 하인리히는 알프스를 넘어 북이탈리아의 카노사성에서 교황 앞에 부복한다. 그레고리우스는 제후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 광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사흘 동안 내내 성문 앞에 서서 국왕의 기장들은 모두 옆에 둔 채로 맨발에 허름한 옷을 입고, 하인리히는 교황의 도움과 위로를 간청하면서 눈물을 그치지 않았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교회에 복종할 것을 서약 받은 다음 파문을 취소해 주었으나, 카노사의 사건은 황제의 위신을 크게 손상시켰다.

카노사의 굴욕 이후 하인리히 4세는 그가 당한 수모를 가슴에 품은 채 귀국하여 왕권의 재건에 진력하였다. 어느 정도 왕권이 안정되어 갈 무렵 교황과의 대립 당시 하인리히 4세를 배반하였던 제후들이 그에 대항하여 루돌프(Rudolf)를 황제로 옹립하자, 하인리히 4세는 증가된 세력을 이용하여 제후들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이런 상황을 방관할 수 없었던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1080년 하인리히 4세를 다시 파문에 처하고 제후들이 옹립한 루돌프를 황제로 승인하였다. 그러나 이미 상당한 교회세력을 확보하고 있었던 하인리히 4세는 오히려 브릭센에서 그를 지지하는 독일의 성직자들과 북부 이탈리아의 성직자들을 소집하여 그레고리우스 7세를 폐위하고 클레멘스 3세를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이어 행동에 나선 하인리히는 우선 독일 내의 반대 제후 세력을 몰아내고, 1082년 이탈리아로 쳐들어가 로마를 점령하고 그레고리우스 7세를 추방하고, 클레멘스 3세의 교황 취임을 교황청에 승인시켰다. 살레르노 지방으로 피신한 그레고리우스 7세는 1085년 눈을 감았다. 결국 카노사의 굴욕 사건은 교황이 독일 제후와 동맹할 수 있는 호기를 놓치게 한 반면, 황제는 시간을 벌게 되어, 실리 면에서 황제의 정치적 승리로 평가할 수 있다.


하인리히 4세와 그레고리우스 7세의 싸움은 일단 하인리히 4세의 승리로 끝이 났다. 그러나 교황과 황제의 치열한 대립이 일단락된 것은 하인리히 4세와 그레고리우스 7세가 죽고 난 다음이었다. 1122년에 마침내 황제 하인리히 5세(Heinrich V)[각주:27]와 교황 칼릭스투스 2세(Callistus Ⅱ)[각주:28] 사이에 타협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보름스 협약(Concordat of Worms)이다. 이 협약으로 성직 임명권은 교황의 권리로 하되 성직자에게 내리는 토지는 국왕의 권한 하에 두게 되었다. 황제가 성직자의 서임권을 포기한 것으로 프랑크 왕국이래의 세속권 우월의 전통이 사라졌으며, 교권이 속권보다 우위에 있음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후 교황권은 독일 내 Staufen가문과 Welfen가문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자리를 놓고 싸운 분쟁에서 정당한 황제를 교황이 임명하는 과정을 겪음으로 절정을 향하게 된다. 그 결과 13세기 초 이노센트 3세(Innocentius III)[각주:29]에 이르러 교황권은 최고 절정에 이르게 된다. 그는 독일 내정에 간섭하여 자신이 내새운 후보인 Staufen가문의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각주:30]를 황제로 선출케 하고, 1201년 프랑스 왕 필립 2세의 이혼 문제에 간섭하였다. 그리고 영국의 내정에 간섭하여 존왕이 원치 않는 인물을 캔터베리 대주교로 받아들이도록 했다.  교황의 우위를 과시하고 세입을 늘리기 위해 존왕을 굴복시켜 영국 전체의 영토를 교황에게 바치게 하여 다시 봉토를 수여하였다. 그는 또한 아라곤(Aragon)[각주:31], 불가리아, 덴마크, 헝가리, 폴란드, 포르투갈, 세루비아의 군주들로 하여금 봉건 가신으로서의 신종을 맹세하게 하였다. 이노센트 3세에 의하면, 교황은 세속 군주의 심판자이다. 그리고 그는 “교황은 태양이며 황제는 그 빛을 빌려서 반짝이는 달”이라고 하여 교황의 우월권을 과시하였다. 11세기 후반부터 13세기 후반까지 약 200년 동안 전개된 십자군 운동은 교황권의 절정을 나타낸 것으로 중세 유럽에서 기독교의 세력이 얼마나 강성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각주:32]



Ⅱ-5. 교황권의 몰락


교황의 세속권은 보니파키우스 8세(Bonifacius Ⅷ, 1294-1303) 치세에 극적으로 실추되었다. 보니파키우스가 겪은 많은 어려움은 그 자신이 초래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마주친 가장 큰 장애물은 국민적 군주 국가가 교황 이상으로 신민들의 충성심을 끌어 모았다는 것이다. 왕권은 견실하게 성장했고, 반면 교황권은 점점 쇠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십자군이 실패함으로써 교황의 권위는 실추되었고, 교회의 타락에 따른 이단이 등장하여 더욱 부채질하였다.

결정적으로는 잉글랜드 및 프랑스 국왕들과의 두 가지 논쟁으로 인해 보니파키우스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 첫 번째는 이노센트 3세에 의해 시작된 성직자 납세 문제에 관련된 것이다. 이노센트는 십자군을 지원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그 자신이 세금을 거두어들였다. 그러나 13세기를 경과하는 동안 잉글랜드와 프랑스에서는 앞으로 있을 성지 십자군이나 Staufen가문에 대한 교황의 십자군에서 교황을 돕기 위해 사용한다는 구실로, 국왕들이 성직자로부터 세금을 부과ㆍ징수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13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아무런 구실이나 변명도 대지 않고 자신들의 전쟁 자금 충당을 위해 성직자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들이기 시작했다. 보니파키우스가 이러한 시도를 막으려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이 이미 잉글랜드 및 프랑스의 성직자들로부터 지지를 잃었음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왕들이 저항했을 때 그는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보니파키우스의 두 번째 논쟁은 프랑스 왕과의 사이에서 벌어졌다. 이 논쟁은 필립 4세가 프랑스의 주교 한 사람을 반역죄로 재판하기로 한 것과 관련이 있다. 과거 그레고리우스 7세와 하인리히 4세 사이의 투쟁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사건의 진짜 핵심은 교황권과 세속권 중 누가 더 우위에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교황이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종전과 마찬가지로 격렬한 선전전이 벌어졌지만, 이제는 거의 아무도 교황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왕은 보니파키우스에 대해 터무니없는 이단 혐의를 걸었고, 부하를 보내 교황을 체포해서 재판에까지 회부했다. 이 사건으로 늙은 교황은 기력이 쇠진되었고 결국 몇 달 후에 사망하고 말았다.

이 사건이후 305년 선출된 프랑스인 교황 클레멘스 5세는 프랑스왕의 강력한 간섭을 받았으며, 로마로 들어가지 못한 채 프랑스에 체류하게 되었다. 교황은 초기에 아비뇽 북동쪽에 있는 카르팡트라스에 정청을 설치하고 아비뇽에 거주했으나, 제4대 클레멘스 6세 때인 1348년 프로방스 백작 겸 시칠리아 여왕으로부터 아비뇽을 사들여 파리 왕궁을 모방한 호화스러운 교황청 궁전을 건조하였다. 제6대인 우르바노 5세 때 일시 로마로 복귀하였으나 교황청의 주요 기능은 아비뇽에 잔류하였고, 그레고리오 11세에 의해 본격적인 로마 복귀가 이루어질 때까지 역대의 프랑스인 교황이 독자적인 프랑스적 교황청 행정을 담당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아비뇽 유수(Avignonese Captivity)[각주:33]이다. 이는 교황 권위의 추락을 일으켜 교회의 분열이 일어나게 한다.[각주:34]



Ⅳ. 결론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중세의 기독교는 로마가톨릭을 중심으로 크게 발전하여 정치ㆍ사회ㆍ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본고에서 주로 다뤘던 정치 문제에 있어서도 가톨릭 세계의 수장이었던 로마 교황은 단순히 정신을 지배하는 종교계의 수장으로 남지 않고, 끊임없이 세속 권력과 충돌하며 세속권력을 장악해간다. 유럽 중세사의 정치 분야에 있어서 가톨릭과 교황은 빠질 수 없는 필수적인 요소이며, 중세 유럽이 형성되고 발전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근대로 시대가 점차 이행해가면서 사람들은 근대적인 의미의 국민국가를 인식하게 되었고, 보편적 세계제국[각주:35]의 권위 위에 세워진 교황의 권위는 점차 약해져간다. 더 나아가 르네상스 이후 사람들은 신을 벗어나 인간을 재발견 하여 점차 신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 때 만연해 있던 가톨릭 세계의 부패와 부조리함은 이러한 경향을 부채질 하였다. 이에 따라 가톨릭교회의 수장이었던 교황의 권위는 갈수록 떨어지게 되었고, 더 이상 가톨릭만이 유일한 종교로 인정받지 않는 세계로까지 나아간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각주:36]로 시작된 종교 개혁이 그것이다. 이전까지의 종교개혁 운동[각주:37]이 단순히 이단으로 몰려 실패하였던 것과는 다르게 떨어진 가톨릭교회와 교황의 위상은 새로운 종교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새로운 시대인 근대의 시작과 함께한다.

이처럼 가톨릭세계와 교황권은 중세와 그 시작을 함께하며 발전하여, 중세를 이루는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는 요소가 되었으며, 중세가 몰락함과 동시에 함께 그 세력이 몰락해간다. 중세를 나타내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로 많은 사람들이 가톨릭교회와 교황을 꼽는 이유이다.

하지만 중세와 이를 이루는 가장 큰 요소인 가톨릭-기독교는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갖게 한다. 중세는 현재의 유럽을 탄생하게 하였으며, 가톨릭은 새롭게 탄생한 중세 유럽에 보편성을 심어 주었다. 이에 따라 유럽인들은 여전히 유럽이라는 보편적 세계 속에 살아가며, 고대 이후로 분열된 자신들의 세계를 하나로 통합하고자 현재도 노력하고 있다. 유럽연합이 그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히틀러의 소련 침공에서도 보이듯이[각주:38] 기독교를 위시한 서유럽 세계는 동아시아에 사는 우리와는 다른 의미의 공동체 의식이 엿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이를 이해하는데 중세 유럽에 있었던 기독교의 발전은 필자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참고 문헌>


E.M. 번즈ㆍR. 러너ㆍS. 미첨, 박상익 옮김, 『서양 문명의 역사Ⅱ』소나무, 1994.

김진웅ㆍ손영호ㆍ정성화, 『서양사의 이해』학지사, 1994.

클라우디아 메리틀, 배진아 옮김,『누구나 알아야 할 서양 중세 이야기』플래닛미디어, 2006.

티모시 존스,『하루 만에 꿰뚫는 기독교 역사』규장, 2007.


이경구,「로마교회와 프랑크왕국의 제휴 -피핀의 쿠데타를 중심으로」한국서양중세사학회, 2001.

이영재,「황 Gregory 7세의 로마 교회론과 성전(holy war)관」한국서양중세사학회, 2007.

이정희,「敎皇權과 프랑크 王國의 同盟」대구사학회,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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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본고에서는 Roman Catholic, Eastern Orthodoxy, Protestant Church를 구분하기 위해 ‘기독교’ 라는 용어 대신, 가톨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도록 하겠다. 단 이러한 구분을 하지 않아도 될 때에는 기독교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겠다. [본문으로]
  2. 비잔틴 제국의 황제(재위 527∼565). 뛰어난 통솔력으로 측근들을 기용하여 옛 로마 서방의 영토 재정복의 꿈을 실현시키고,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고대 로마 법학자들의 ‘학설집’, ‘법학 입문’ 및 법전 편찬 이후에 유스티니아누스가 반포한 ‘신법’으로 이루어진 《로마법 대전》을 완성하였다. [본문으로]
  3. 프랑크왕국의 초대 국왕(재위 481∼510)으로 메로빙거 왕조의 창시자이다. 전 프랑크족을 통합하여 프랑크 왕국을 수립하였고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로마 교황과의 우호관계를 보증하게 되었다. [본문으로]
  4. 클로비스는 다른 게르만족과는 다르게 아리우스파(Arianism)가 아닌 아타나시우스(Athanasius)파로 개종하였다. 이 둘의 차이는 대표적으로 삼위일체(三位一體, trinitas)설에 있다. 이는 오늘날 기독교의 일반적인 교리로, 하느님은 성부(聖父)·성자(聖子) 및 성령(聖靈)의 세 위격(位格)을 가지며, 이 세 위격은 동일한 본질을 공유하고, 유일한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교리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으로 인정한 것으로, 325년 니케아공의회(公議會)에서 교회의 정통신조로 공인되었으며, 이를 인정하지 않은 아리우스파는 이단으로 인정되었다. 프랑크 왕국은 로마인들이 믿는 아타나시우스파로 개종함으로써 유럽에 그 뿌리를 비교적 확고하게 내릴 수 있었다. [본문으로]
  5. Merovingian dynasty, 프랑크왕국 전반기의 왕조(481∼751). 명칭은 클로비스가 속한 부족의 시조인 메로베우스(Meroveus)의 이름에서 따왔다. [본문으로]
  6. 궁재와 백작령의 설치는 봉건제도의 모태가 되기도 한다. 또한 이때 백작령은 그 지역 사람을 임명하도록 규정하여서, 이후 봉건 제후들의 법적 근거가 된다. [본문으로]
  7. 게르만어로는 동쪽 나라를 의미하며, 지명(地名)으로서는 6세기 후반에서 8세기까지 쓰였다. 지역은 갈리아 북동부에 해당하며, 프랑스 북부 메스를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 대략 511년 클로비스의 죽음 뒤에 행해진 분할 때의 티에리 왕국에 해당한다. 613년 클로타르 2세의 왕국 통일 후의 재분할에서 분국명으로 정착하였으며, 다른 여러 분국과 더불어 궁재직(宮宰職)을 두었다. 뒤의 카롤링거왕조는 아우스트라시아 궁재의 가계에서 배출되었다. [본문으로]
  8. ‘새로운 국토’라는 뜻이지만 비(非)아우스트라시아(Austrasia)라는 뜻도 된다. 메로빙거왕조 때의 프랑크왕국의 영토는 처음에는 여러 개의 분방(分邦)으로 나누어졌으나, 차차 아우스트라시아와 네우스트리아의 2분국이 되었다. 전자는 남서 독일에서 프랑스의 북부에 이르는 왕국의 북동부에 위치하였고, 후자는 센강 유역을 중심으로 왕국의 서부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9세기 이래 그 지역이 점점 좁아져서, 11∼12세기의 네우스트리아는 노르망디 북방만을 가리키게 되었다. [본문으로]
  9. 이로 인해 제국의 중심지는 동쪽으로 이동하게 된다. [본문으로]
  10. 왕가의 계보가 대(大)피핀과 메츠의 주교 아르눌프까지 올라가기 때문에 아르눌핑가(家)라고도 한다. 메로빙거 왕조 말기 프랑크왕국의 권력은 궁재(宮宰)에게로 집중되었다. 688년에 중(中)피핀이 프랑크왕국 전체의 궁재(宮宰)가 되었고, 그 아들 카를 마르텔(Charles Martel)이 732년에 투르와 푸아티에 사이에서의 전쟁에서 이슬람교도의 침입을 격퇴함으로써 프랑크왕국의 실질적 지배자가 되었는데, 751년에 카를 마르텔의 아들 소(小)피핀은 쿠데타로 메로빙거왕조 최후의 왕 힐데리히 3세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본문으로]
  11. 프랑크 왕국 내의 다른 부족장들을 설득한 대의명분을 로마 교황이 주었다. [본문으로]
  12. 이전 시기인 6세기 경 동고트족이 이탈리아를 점령했을 때에는 비잔틴의 유스티니아누스의 구원을 받았고, 라벤나(Ravenna)에 Patricius Romanorum이 설치 되었었다. 하지만 8세기 경의 비잔틴은 이탈리아를 구원할 힘이 남아있지 못했다. [본문으로]
  13. 왕은 특별한 신의 대리인으로 세례 대신 기름을 붓는다. [본문으로]
  14. 이후 1250년까지 모든 장원에 교회가 보급되었다. 교회가 보급됨으로써 7성사를 통해 교회는 일반 사람들을 장할 수 있었다. hamlet에서 village로의 변화. [본문으로]
  15. 카롤링거 왕조의 제2대 프랑크 국왕(재위 768~814). 몇 차례의 원정으로 영토 정복의 업적을 이루고 서유럽의 정치적 통일을 달성했다. 중앙집권적 지배를 가능하게 하면서 지방봉건제도를 활용했고 로마 교황권과 결탁하여 서유럽의 종교적인 통일을 이룩하고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이룩했다. 카를 대제 혹은 카를로스 대제라고도 불린다. 새로운 왕조인 카롤링거 왕조의 이름은 여기서 유래하였다. [본문으로]
  16. 하지만 당시 샤를마뉴의 직위는 Imperator Romanorum et Rex Francorum 으로 단순히 두 왕관의 결합을 의미한다. 아직 로마인과 게르만족의 화합이 완벽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단지 로마 제국의 후계자임을 인정받은 것일 뿐이었다. [본문으로]
  17. 독일 국왕(재위 936∼973)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재위 962∼973). 주교 ·대수도원장을 왕권의 정치적 지주로 삼고 교회령을 물질적 토대로 하는 제국교회정책을 확립하였다. 이탈리아 원정으로 독일 왕권을 초독일적인 황제권으로 높였으며 문학 ·예술의 융성을 가져왔다. 작센 왕조. [본문으로]
  18. 본명은 옥타비아누스. 로마 교황(재위 955∼963). 교회의 ‘철의 세기(世紀)’의 대표적 인물로 신성로마제국 초대 황제 오토에게 파면당하였다. 황제에 의해 폐위된 교황의 전례가 되었다. [본문으로]
  19. 오토가 받은 직위는 Imperator Romanorum et Francorum 으로 로미인과 게르만족이 비로소 통합되었음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20. Heiliges Römisches Reich. 962년에 오토 1세가 황제로 대관한 때로부터 프란츠 2세가 제위(帝位)를 물러난 1806년 8월까지에 걸쳐 독일 국가 원수(元首)가 황제 칭호를 가졌던 시대의 독일제국의 정식 명칭. 신성로마제국은 고대 로마제국의 부활·연장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에 로마제국이라 불렸고, 또 고대 로마의 전통 보존자인 그리스도교회와 일체라는 뜻에서 신성(神聖)이라는 말을 붙였다. 그러나 실제로 신성로마제국의 호칭이 쓰이기 시작한 것은 15세기로서 그 이전은 단순히 제국 또는 로마제국이라 불렸다. [본문으로]
  21. 성직서임권(聖職敍任權). 가톨릭의 주교, 수도원장 따위의 성직을 임명하는 권한. [본문으로]
  22. 중세 독일의 잘리에르왕조 제2대 국왕, 신성로마 황제(재위 1039∼1056). 독일 최강의 지배자였다고 한다. 왕권을 공고히 하고, 베멘·헝가리를 정복해 독일 왕의 종주권(宗主權)을 인정하게 만들었다. 제1회 이탈리아 원정에서 대립하는 3교황을 한꺼번에 추방하고, 새 교황으로 클레멘스 2세를 세우는 등 로마 교황을 완전히 자기 지배 아래 두었다. [본문으로]
  23. 중세 독일 잘리에르왕조 제3대 국왕, 신성로마제국 황제(재위 1057∼1106). 모후 아그네스의 섭정 때 상실한 왕령(王領)의 회복을 위해 지방제후들과 대립, 반란을 초래했다. 그 와중에 교황 그레고리오 7세와의 사이에서 서임권(敍任權) 문제로 충돌하여 파문을 당하고, 궁지에 몰리자 교황에게 사면을 간청하여 겨우 파문의 해제를 받은 이른바 ‘카노사의 굴욕’을 겪었다. [본문으로]
  24. 한편 황제의 권력은 당시 봉건체제 하에서 절대적인 군주권을 누리기는 힘들었다. 또한 강력한 제후들에게 힘을 얻은 교황과 황제의 대립은 황제를 배신할 좋은 명분이 될 것이다. [본문으로]
  25. 중세교회개혁운동을 지도하고 로마 교황권의 전성기를 이룩한 교황(1073~1085). [본문으로]
  26. 수도원 개혁 운동은 910년에 클뤼뉘 수도원이 설립되면서 시작되었다. 그 내용으로는 첫째, 세속 권력이나 교회 권력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해 수도원을 교황 직속으로 했다. 둘째, 종전의 모든 베네딕트 수도원들이 제각기 독립적이고 대등했던 데 비해, 클뤼뉘 수도원은 조직을 구성하여 속한 수도원들로 하여금 클뤼뉘의 명령에 복종하도록 하였다. 이후 클뤼니 교단의 세력은 급속히 성장하여 1049년에는 67개를 헤아리게 된다. [본문으로]
  27. 잘리에르왕조 최후의 독일 국왕, 신성로마제국 황제(재위 1106∼1125). 서임권(敍任權) 투쟁을 종결시켰으며 처음에는 교황과 대립하였으나, 이후 교황 칼릭스투스 2세와 보름스협약을 맺고 타협하였다. 이 협약으로 이탈리아와 부르군트에서의 황제의 교회에 대한 영향력은 완전히 상실되었다. [본문으로]
  28. 제162대 교황(재위 1119~1124). [본문으로]
  29. 교황권 신장에 크게 공헌한 로마의 교황(1198∼1216)이다. 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가 죽은 뒤 독일의 복잡한 정정을 기화로, 로마냐·마르크안코나 등지의 황제령을 교황령에 합병하였다. 재임 중 제4회 십자군(1202∼1204)이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했다. [본문으로]
  30. 슈타우펜왕조 최후의 신성로마 황제(재위 1215∼1250). 시칠리아의 왕으로서 1212년 독일왕이 되었으며, 제6차 십자군을 일으켜서 예루살렘 왕국을 수립하고 예루살렘왕이 되었다. [본문으로]
  31. 스페인 북동부의 옛 왕국. 현재의 지명. [본문으로]
  32. 1215년 제 4차 lateran 종교회의에서는 대관식이 정의되는데, 대관식은 교황이 주관하는 것으로, 불완전한 통치자 Rex를 완전한 통치자 Imperator로 만드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이는 황제에 대한 교황권의 우위를 대관식을 통해 입증한 것으로 교황권의 최고 극치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본문으로]
  33. 1309∼1377년까지 7대에 걸쳐 로마 교황청을 남프랑스의 론강변의 도시 아비뇽으로 이전한 사건. [본문으로]
  34. 1378년 로마에서 우르바노 6세가 선출되자 프랑스인파(人派)는 이에 불만을 품고 대립되는 교황 클레멘스 7세를 내세워 또다시 아비뇽에 교황청을 열어 1417년까지 존속시켰다. 교회의 자체적 분열. [본문으로]
  35. 로마제국 [본문으로]
  36. 독일의 종교개혁자이자 신학자. 면죄부 판매에 '95개조 논제'를 발표하여 교황에 맞섰으며 이는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었다. [본문으로]
  37. 위클리프와 후스의 종교개혁 운동 등 [본문으로]
  38. 독ㆍ소 전쟁에서 히틀러는 공산주의-전체주의에 맞서 기독교 자유주의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침공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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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배리석불입상(慶州拜里石佛立像)
보물 제63호

김 솔


 포석정(鮑石亭)에서 삼릉(三陵)입구 사이에 삼불사(三佛寺)라는  절이 있는데 이곳이 선방골(禪房谷)이다. 이 골짜기는 서남산 골짜기 중에서 계곡의 길이가 짧은 곳 가운데 하나이지만 삼체석불입상(三體石佛立像)이 있어서 많이 알려진 곳이다. 삼체석불입상이 자리잡고 있는 제1사지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 탑지명에 의하면 선방사(禪房寺)가 있었음을 알 수 있고, 동시에 선방곡(禪房谷)이라는 계곡의 이름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조사된 사지(寺址)는 3개소이고 불상(佛像)은 삼체석불 이외에 석조보살입상(石造菩薩立像)과 최근에 발견된 선각여래입상(線刻如來立像)이 자리하고 있다.


삼존석불(三尊石佛)

 지금은 10여 년 전에 지어진 보호각 안에 서 있다.

 이 불상들은 선방사지에 넘어져 흩어져 있던 노천불(露天佛)을 1923년 다시 세워 놓은 것이다. 1945년에 간행한 <경주 남산의 불적(慶州 南山의 佛蹟)>에 의하면 1923년에 조사할 때까지 삼체석불은 제각각의 위치에 누워있었다 한다. 옛날 터전이었다고 생각하는 법당 터에 다시 세웠는데 법당 자리는 이미 심히 교란되어서 제 모습 찾아 재현하가 어려웠다. 보호각은 신식의 목조로 지은 건축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 맞배기와 지붕을 하고 있다. 기둥 칸 사이에 벽을 치지 않고 다 개방되어있다.

 중앙의 본존상은 큼직한 돌을 평평하게 다듬고 앞면을 부조(浮彫) 형식으로 조각한 우람한 체구로서, 커다란 자연석 위에 묵중하게 서 있다. 신체에 비해 얼굴이 큰 사등신(四等身)의 동자형(童子形)이다. 머리카락은 나발(螺髮)이며 육계가 3단으로 된 것이 매우 특징적이다. 얼굴은 사각형으로서 뺨을 부풀게 하고 턱은 완강하게 처리하여 힘과 활력을 나타내었다. 눈은 눈두덩을 부풀게 하고 눈을 가늘게 처리함으로써 눈웃음을 짓게 하였으며, 양쪽 뺨을 한껏 부풀게 하고 입을 꾹 다물면서 양가를 깊게 파서 미소가 얼굴 가득히 흘러넘치게 하였다. 코는 큼직한 삼각형이며 귀는 어깨에 닿고 있지만 끝이 깨어져 형태가 분명하지 못하다. 목은 짧은 편으로 삼도(三道)[각주:1]의 표현은 보이지 않는다.

 상체는 우람한 면을 과시하지만 하체는 불분명한 다리의 윤곽 등으로 빈약하게 보여 불균형을 이룬다. 어깨의 팽팽한 윤곽 외에 가슴 등은 평평하며 다리의 볼륨이 약간 표현된 것은 주목된다. 시무외ㆍ여원인(施無畏[각주:2]ㆍ與願印[각주:3]을 한 두 손은 적당한 크기이다.

 법의(法衣)는 통견의(通肩衣)[각주:4]를 입고 있는데, 오른쪽 어깨로 가사 자락을 약간 덮고 있고 팔에 걸친 옷자락도 짧고 묵중하게 내렸으며, 그 밑으로 광배에 해당하는 면 전체에 걸쳐 옷자락이 덮어져 내려갔다. 가슴에서 발목까지는 U자형의 옷주름 다섯 가닥이 표현되었는데, 모습은 굵은 요철형의 띠로서 매우 특징적인 것이다.

 우협시는 두광에 화문대와 화불을 조각하였고, 짧은 목걸이와 발목까지 화려하고 무거운 목걸이가 길게 드리워지고 있다. 앳된 미소, 통통한 얼굴과 손, 팔 등은 역시 아이 같은 모습으로 다른 두 상에 비하여 세부표현이 매우 입체적이다. 오른손은 자연스럽게 긴 목걸이를 쥐고 있고, 왼손은 연꽃봉오리를 쥐고 있다. 양감(量感)있고 탄력적인 얼굴, 순진무구한 미소, 짧은 체구, 묵중하고 장식적인 목걸이 등의 장신구, 5구의 화불(化佛)이 새겨진 원형(圓形)의 두광(頭光), 앙련(仰蓮)[각주:5][각주:6]과 복련(覆蓮)[각주:7]이 새겨진 묵중한 대좌(臺座)등에서 기본적으로 본존불상과 동일한 형태인데 그 보다는 좀 더 장식적이라고 할 수 있다.

 좌협시(左脇侍)는 매우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고 왼손에 정병을 들고 있다. 옷주름은 거의 생략되어 있으며, 두광에는 아무 장식이 없어 전체적으로 단순하고 소박하여 좌협시의 복잡하고 화려한 보살상과 대조적이다. 네모난 바위 위에 서서 오른손은 설법인(說法印)[각주:8]으로 가슴에 들고 왼손은 아래로 드리운 채 정병(淨甁)을 쥐고 있다. 보관에 새겨진 작은 부처와 더불어 이 보살이 관음보살(觀音菩薩)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크기는 본존불상 높이 278cmㆍ좌협시보살상 높이 235cmㆍ우협시보살상 292cm이다.


 



<배리석불입상을 통해 알아본 불상 양식의 흐름>

7세기에 들어서면 신라조각에서 새로운 양식이 나타나게 된다. 지금까지의 불상들과는 달리 어린아이 같은 신체비례에 통통한 얼굴을 가진 불상들이 제작되었는데, 이 시기에 신라 불교 조각계는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했다. 그것은 7세기 초에 중국 수나라의 수도 장안에서 귀국한 월광(月光)스님을 비롯한 유학승들이 가져온 중국불상을 통해 새로운 양식이 신라(新羅)에 수용되었기 때문이다. 수(隋)의 조각은 지역적으로 북주(北周)의 조각전통을 계승하였는데 여기에 북제(北齊)와 남조(南朝)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발전했다. 북주조각을 대표하는 가장 특징적인 양식이 바로 아동의 신체 및 얼굴 모습과 흡사한 불상양식이다. 가장 대표적인 불상으로 경주 배리의 선방사라고 전하는 절터에서 발견된 삼존불입상(三尊佛立像)을 꼽을 수 있다. 4등신 가량의 신체비례나 동글동글한 입체미가 강한 조형감, 형태면에서 단순해지고 묵중해진 본존상의 오른쪽 어께위에 대의 끝단이 살짝 걸쳐진 표현은 편삼(偏衫)[각주:9]이라고 해석되기도 하는데, 중국에서는 6세기에 남북조 조각에서 널리 유행하였고 백제시대의 불상인 예산 사방불(四方佛)과 익산 연동리 석불좌상(石佛坐像)에서도 보인다.


 

 

<참고문헌>

 

방홍국,『신라의 마음 경주 남산』, 한길아트, 2002.

신영훈,『경주 남산』, 조선일보사, 1999.

윤경렬 『경주 남산(둘)』, 대원사, 1989.
최성은,『석불 돌에 새긴 정토의 꿈』, 한길아트, 2003.


國立文化財硏究所,「慶州南山의 佛敎遺蹟 2」-西南山 寺址調査報告書-, 1997.

國立文化財硏究所,「慶州南山-精密學術調査報告書」,경주시,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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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불교에서 깨달음에 이르는 3가지 수행단계를 이르는 용어. 불교의 이상을 실현하는 세 가지 과정인 견도(見道)·수도(修道)·무학도(無學道)를 말한다. [본문으로]
  2. 시무외인(施無畏印): 이포외인(離怖畏印)이라고도 한다. 말 그대로 중생에게 무외(無畏)를 베풀어 공포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우환과 고난을 해소시키는 대자의 덕을 보이는 인상이다. 손의 모습은 오른손을 꺾어 어깨높이까지 올리고 다섯 손가락을 가지런히 펴서 손바닥이 밖으로 향하게 한 형태이다. 나를 믿으면 두려움이 없어진다는 뜻이다. 여원인(與願印)과 함께 한국 삼국 시대의 불상에서 그 종류와 관계없이 모두 취하고 있는 인상이다. 그래서 이 둘을 통인(通印)이라 한다. 여원인과 마찬가지로 부처님이 이 수인을 한 때와 장소가 뚜렷하지 않기 때문에 불상이 이 수인을 하였다고 해서 그것이 어떤 장소, 어떤 의미를 나타낸 것인지 확실치 않다. [본문으로]
  3. 왼팔을 길게 아래로 늘어뜨리고 손가락을 펴서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도록 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이때 마지막 두 손가락을 약간 구부린 불상이 많다. 오른손을 어깨높이로 올리고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는 시무외인과 반대되는 형상인데, 대개 오른손은 시무외인을, 왼손은 여원인을 하는 경우가 많다. [본문으로]
  4. 옷 모양새 가운데 양 어깨를 모두 덮은 경우를 이른다. [본문으로]
  5. 연꽃 따위가 위로 향한 모양(模樣). 또는 그 무늬 [본문으로]
  6. 연꽃 따위가 아래로 향한 모양(模樣). 또는 그 무늬 [본문으로]
  7. 연꽃 따위가 아래로 향한 모양(模樣). 또는 그 무늬 [본문으로]
  8. 전법륜인(轉法輪印) 이라고도 한다. 부처의 설법은 이상적인 제왕 전륜성왕(轉輪聖王)이 윤보(輪寶)로써 적을 굴복시키듯 법으로 일체 중생의 번뇌를 제거하므로 전법륜(轉法輪)이라 한다. 전법륜인은 이때 부처님이 하신 손 모양으로, 양손을 가슴까지 올려 엄지와 장지 끝을 서로 맞댄 후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하여 펴진 마지막 두 손가락 끝을 오른쪽 손목에 대고, 오른손은 손바닥을 밖으로 향한 형태이다. [본문으로]
  9. 승기지와 부견의를 봉합(縫合)하고 옷섶을 단, 중의 옷. 상반신을 덮고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옆구리에 걸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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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가흥리 마애삼존불상, 암각화


김 솔


영주시(榮州市) 가흥리(可興里)에 위치한 마애삼존불상(磨崖三尊佛像)은 남동향하여 강변 암벽 한가운데에 새겨져 있다. 마애불의 왼편 벼랑에는 암각화(岩刻畵)가 새겨져 있어 주목된다. 암각화는 여덟 개의 방패 모양 혹은 칼 손잡이 모양인 검파식(劍把式) 형태로 배열되어 있다. 문양의 단출한 형태로 미루어볼 때, 제작 시기는 삼한 내지 삼국시대 초기로 추정된다. 또 암벽에는 구멍을 쫀 성혈(性穴)의 흔적도 뚜렷하게 남아있다. 경치 좋은 강변에서 어로와 수렵, 농경을 토대로 살았던 고대인들의 공동체적 신앙터였던 증거이다. 강변로가 나는 바람에 제단의 분위기는 깨졌지만, 암벽 앞에 서면 신성한 장소였음을 어렵지 않게 감지할 수 있다. 불교 정착 이후 암각화보다 신성(神性)이 강한 부처를 조성한 까닭인지, 암벽의 가장 높았던 바위에 마애불이 조각되어 있다. 마애불 앞의 비좁은 턱에는 건물 기둥을 세웠던 흔적들이 남아있다.

영주 가흥리 마애불상은 북방 고구려의 문화가 들어오는 길목인 죽령(竹嶺)으로 연결되는 교통로 상에 위치하여 그 중요성이 강조되는데, 본존상의 입체감과 좌우협시보살입상의 동적인 움직임 등은 삼국시대 신라 마애불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석조각의 새로운 활력을 느끼게 한다.



  영주 가흥리 마애삼존불상(榮州可興里磨崖三尊佛像)


   통일신라 7세기 후반, 보물 제221호, 본존 높이 3.2m, 좌협시보살상 2m, 우협시보살상 2.3m


통일신라로 들어오면서 불상조각은 입체감과 양감이 발달한 초당(初唐) 양식의 영향을 받아 점차 세련되어지기 시작한다. 삼국통일 시기에 활발한 대중교류를 통해 당의 문물이 수입되는 가운데 새로운 양식의 불상들이 많이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643년 당(唐)에서 귀국한 자장(慈藏)스님이 대장경과 불상 등을 가지고 왔는데, 이때 가져온 장경이 400여 함이라고 하니 불상 또한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초당 불상들은 통일시기 신라조각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고신라 불상들의 양식에서 변화하는 과도기의 영주 가흥리 마애삼존불상은 이 시기의 불상으로 추정된다.


삼존불상은 고부조로 조각되어 원각상에 가까운 입체감과 양감을 보인다. 본존상의 머리는 민머리이고, 얼굴은 둥글고 살이 많아 뺨이 팽팽하며, 가볍게 다문 입가는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대의는 양 어깨를 가리도록 통견(通肩)식[각주:1]으로 입었고, 어깨와 가슴 위로는 옷주름이 묵직하게 흘러 친의 두꺼운 질감을 잘 나타내고 있다. 두 손으로 짓고 있는 시무외인[각주:2]ㆍ여원인[각주:3]의 수인이 매우 자연스럽다. 연꽃으로 장식된 두광 안에는 세 화불이 떠 있고, 두광 밖으로는 화염문 방식이 간결하다. 본존의 앉은 자리를 감싼 대좌의 연잎이 큼지막하고 시원스럽게 피어올라 있다. 눈이 손상되지 않은 상태였다면, 둥실하게 살이 오른 동안(童顔)의 표정이 좋았을 것이다. 이는 고신라 불상들에서 볼 수 있는 양식적 특징으로, 신라 통일 직후의 조각미를 보여준다.

좌협시보살상은 두 손을 올려 천의를 쥐고 있는데 비록 눈은 손상되었으나 귀여운 아기 같은 얼굴 모습은 그대로 남아 있다. 또한 이 보살상은 약간의 움직임이 표현된 몸체를 본존상 쪽으로 살짝 기울이고 있는데, 이는 당 양식의 영향이라고 생각된다. 몸의 앞부분은 7세기 전반부터 신라 지역에서 크게 유행했던 2단 천의 형식을 보여준다. 반대편의 우협시보살입상은 갸름하고 예쁜 얼굴에 입술이 섬세하게 조각되었으며 두 손을 들어 합장한 채로 서있다. 한편 2003년 여름에 내린 폭우로 삼존불 앞쪽의 바위가 갈라지면서 한 구의 마애불좌상이 더 발견되었다.

이 마애불은 통일신라시대의 조각 흐름을 잘 보여주는 사실주의적 불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김덕삼이라는 부자가 자식을 얻으려고 원불(願佛)로 조성했다는 전설도 전한다.


사진 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 http://www.cha.go.kr/



영주 가흥리 암각화(榮州可興里岩刻畵)


    경북유형문화재 제248호


우리나라 마애불의 시원으로서, 무교적 바위 신양에서 불교로 변화된 증거가 같은 공간에 남아있는 사례로 영주 가흥동의 마애삼존불과 암각화를 들 수 있다. 영주는 신라의 북쪽이자 고구려와 인접했던 지역으로, 낙동강 상류의 너른 강변과 소백산맥이 병풍처럼 펼쳐진 공간에 마애불과 암각화가 위치해 있다. 암각화는 여덟 개의 방패 모양 혹은 칼 손잡이 모양인 검파식(劍把式)형태의 이방연속무늬[각주:4]로 배열되어 있다. 선을 쪼아서 굵은 선으로 표현하는 수법을 사용하였고, 암벽에는 구멍을 쫀 성혈의 흔적도 뚜렷하게 남아있다. 이는 고령 양전동 암각화와 울산 천전리 암각화에서 볼 수 있는 수법이다. 암각화의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문양의 단촐한 형태로 미루어볼 때 제작 시기는 삼한시대나 삼국시대초기로 추정된다. 아마도 이곳은 경치 좋은 강변에서 어로와 수렵 그리고 농경을 토대로 살았던 고대인들의 공동 신앙터였을 것이다. 현재는 강변로가 나는 바람에 제단의 분위기는 깨져 있지만, 암각화의 위치에서면 신성한 장소였음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그런 곳이기에 불교가 정착된 뒤로는 암각화보다 신성(神性)이 강한 마애삼존불을 조성했을 것이다.




   한국 마애불 변천 양식


마애불은 벼랑의 바위에 새겨놓은 불상을 말하는데, 마암불(磨岩佛)이라 부르기도 했다. 땅과 한몸을 이룬 암벽에 조각해 놓았기 때문에 마애불은 그것을 조성한 당대 사람들의 심성과 미의식은 물론 부처를 새기기 위해 선택한 바위의 지형적 특성을 생생히 파악하게 해준다. 그리고 조성 당시부터 현재까지 이어온, 무불(巫佛)이 혼재된 신앙 형태가 뚜렷이 남아 있는 편이다.[각주:5]

따라서 마애불은 어느 문화유산보다 가연과 종교와 예술, 그리고 삶의 흔적이 함께 어우러진 공간을 연출하고 있다. 우리 불교 미술사에서 마애불은 자연에 거스름 없이 신앙과 예술을 조화시켜낸 한국문화의 특성이 가장 뚜렷하게 반영된 유산으로 꼽을 만하다.

이러한 마애불은 600년을 전후한 백제의 서산 마애삼존불에서 시작하여 구한말 서울주변의 마애불까지 1300년 동안 꾸준히, 그리고 200여 곳이 넘는 전국에 걸쳐 조성되어 왔다.

 한국의 불교미술사에서 마애불이 발생한 시기는 600년 전후로 추정된다. 충남 서해안 지역인 서산과 태안반도에 조성된 마애불을 시발로 잡는데 이는 백제의 공주시대 이후 바다를 통해 중국과 교역하였던 요지였기 때문이다. 한국 마애불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서산 마애삼존불이 보여주듯이 한국의 마애불은 암벽의 형태와 바위의 결을 최대한 살린 뛰어난 조각미를 창출하였다.

불국토 건설을 꿈꾸던 신라인의 이상미가 반영된 8세기 신라의 마애불은 부처의 육신을 탄력 있게 잘 살린 부조예술의 뛰어난 기량을 뽐냈으나 이 또한 바위의 원형을 최대한 살리려는 배려를 잊지 않고 있다. 주로 당시의 수도였던 경주 주변에 조성되어 있으며 이상화된 종교의식과 최고의 조각미가 완벽하게 결합하여 불교미술의 절정을 이루었던 시점과 때를 같이한다.

신라 후기 지방 호족 세력의 성장과 함께 마애불의 조성이 확산되면서, 그 호족의 미의식이 실린 9세기 마애불부터는 절대적 존재로서의 이상화된 부처의 정형이 깨지고 조각수법이 다양해졌다. 표정은 딱딱해졌지만 바위에 새긴 변상도나 불화 같은 이미지의 선각형 마애불이 출현하였고, 안면은 부조로 조각하면서 몸은 선묘로 새기는 독특한 형식도 창출되었다.

마애불이 가장 많이 조성된 전성기인 고려에 들어서서는 신라 말의 사회적 전통을 배경으로 한 마애불이 가장 유행하였다. 지방 호족의 후원 아래 조성되면서도 민중의 감성과 함께하는 마애불들이 경기ㆍ충청ㆍ전라도 지방 곳곳에 들어섰다. 고려시대 이후 괴력을 갖춘 신이적인 존재로서의 돌부처, 곧 토속미 가득한 마애불 조각에는 부처의 도상적 격식보다 기복신앙의 의미가 강조되어 있는데 이는 ‘괴체의 미학’을 구현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고려시대이후 사대부 문인 문화의 융성과 함께 정치이념이 유교로 바뀌게 되면서 조선시대에는 수도인 한성주변을 제외하고선 마애불의 조성이 급격히 줄어들게 된다. 그러나 마애불을 새긴 암벽이나 바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변형하지 않았다는 점은 우리 마애불의 변함없는 특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암각화 변천 양식


옛 사람들은 바위가 자신들의 간절한 염원을 들어주는 영원의 매개체라 믿었다. 또한 그림 자체가 사람들의 바람을 재현하고 있었고, 주술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주술적인 마력이 있는 돌에 주술적인 수단이자 삶의 목표를 그림으로 그렸다는 것은 바로 신앙적인 사고의 표출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성소에 있는 돌에 자신들의 바람을 표현하기 위해 또 그 바람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간절한 마음을 모아 암각화를 제작하였던 것이다.

암각화의 그림을 새기는 작업은 신으로부터 특별한 능력을 부여받은 샤먼이나 제사장만이 할 수 있었으며 특별한 장소에 있는 바위를 선택하여 대부분 동남쪽이나 남쪽을 향하게 하여 그림을 새겼다. 돌에 새겨진 그림들은 형태에 따라 세 가지로 분류 되는데 사물의 형상을 사실대로 표현한 물상(物象)문양과 동그라미ㆍ겹 동그라미ㆍ세모ㆍ마름모 등과 같은 기하학문양, 그리고 신상(神像을) 새긴 문양이 있다. 대부분의 암각화 유적지는 강가의 바위 절벽이나 강과 인접한 곳에 있거나, 산으로 둘러싸인 봉우리에 있다.

우리나라의 암각화들은 대부분 신석기시대 후기부터 초기 철기시대에 속하는 유적들이다. 1970년 12월 25일 울산 천전리 암각화가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으며, 이듬해 고령 양전동과 울산 대곡리 반구대의 암각화가 발견되면서 지금까지 10여곳 이상에서 암각화가 확인되었다.




  <참고 문헌>


박정근 외,『한국의 석조문화』, 다른세상, 2004.

이정수ㆍ박원출ㆍ조원영,『테마가 있는 한국문화』, 선인, 1999년.

이태호ㆍ이경화,『한국의 마애불』, 다른세상, 2001.

최성은, 『석불 돌에 새긴 정토의 꿈』, 한길아트, 2003.

최성은, 『KOREAN Art Book』석불ㆍ마애불 편, 예경, 2004.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엮음,『답사여행의 길잡이』경북 편, 돌배게, 1995.


박정근,「한국의 암각화 연구 성과와 문제점」, 한국고대학회, 선사와 고대 제15호, 2000.

이성도,「백제ㆍ신라 마애불의 조형성 연구」, 한국미술교육학회, 미술교육논총 美論20券, 2006.

장두영,「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마애불 연구」, 한남대 대학원, 2003.

문화재청 홈페이지 : http://www.cha.go.kr/



* 본 자료를 무단으로 도용할 시 책임이 따릅니다.

  1. 불상이나 승려의 옷 모양새 가운데 양 어깨를 모두 덮은 경우를 이른다. 통양견(通兩肩)·통양견법 또는 통피(通披)라고도 한다. ‘양 어깨를 통하여 나타난다’는 뜻이다. 여기서 나타난다는 것은 복전(福田)이 나타난다는 뜻인데, 이는 공경을 나타내는 편단우견(偏袒右肩)과 대치된다. 비구가 거리에 나가 걸식할 때는 통견을 하는 것이 원칙이다. [본문으로]
  2. 施無畏印: 이포외인(離怖畏印)이라고도 한다. 말 그대로 중생에게 무외(無畏)를 베풀어 공포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우환과 고난을 해소시키는 대자의 덕을 보이는 인상이다. 나를 믿으면 두려움이 없어진다는 뜻이다. 여원인(與願印)과 함께 한국 삼국 시대의 불상에서 그 종류와 관계없이 모두 취하고 있는 인상이다. 그래서 이 둘을 통인(通印)이라 한다. 여원인과 마찬가지로 부처님이 이 수인을 한 때와 장소가 뚜렷하지 않기 때문에 불상이 이 수인을 하였다고 해서 그것이 어떤 장소, 어떤 의미를 나타낸 것인지 확실치 않다. [본문으로]
  3. 오른손을 어깨높이로 올리고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는 시무외인과 반대되는 형상인데, 대개 오른손은 시무외인을, 왼손은 여원인을 하는 경우가 많다. [본문으로]
  4. 양쪽 또는 아래위로 연결되어 두 방향으로 전개되는 연속무늬 형식. [본문으로]
  5. 마애불은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의 산악숭배, 암각화, 거석문화 등 선사시대부터 형성된 무교적 신앙형태와 결합하면서 발전하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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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ude Lévi-Strauss

Papers/etc : 2009. 5. 5. 15:24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Claude Lévi-Strauss, 1908.11.28~]



김 솔


   레비-스트로스는 소쉬르 이후, 언어학에만 국한되었던 구조주의를 다른 문화연구(인류학)에 이끌어 오는데 큰 기여를 했다.


1. 사상과 이론의 배경


   ○레비-스트로스 스스로 말하는 세 스승


   레비-스트로스는 자기 삶의 일부를 자전적으로 쓴 책인 『슬픈 열대』에서 자신의 사유세계를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친 세 가지 큰 요소로서
지질학, 프로이트 정신분석학, 그리고 마르크스사상을 꼽으며 그것들을 ‘나의 세 스승’이라고 표현했다.

지질학의 원리를 통해 레비-스트로스는 겉모습으로 사물을 판단하거나 이해하기보다 밑에 깔려 있는 진실을 찾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사유의 원칙을 터득하게 되었다. 변화 있는 지대의 신비로움 뒤에는 그런 현상을 낳고 지탱해 주는 어떤 지질학적 법칙이 있듯이 변화무쌍한 사물들의 겉모습 뒤에는 그것을 설명해 주는 어떤 원리가 숨어 있다고 느꼈다.

레비-스트로스는 프로이트 이론을 접하면서도 지질학의 원리와 비슷한 어떤 것을 느꼈다고 한다. 꿈이나 히스테리 등 사람들의 정신활동에서 겉으로 나타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을 겉모습 자체만 바라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밑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보다 더 근본적인 마음의 흐름을 뜯어보는 것이 정신분석학이다.

레비-스트로스는 또한 젊은 시절에 그가 심취했던 마르크스이론에서도 지질학이나 정신분석학에서 느끼던 비슷한 것을 느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을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고 그 뒤에 자리 잡고 있는 진리를 파헤쳐 알게 하는 것이 그것이다.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던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급모순을 발견하고 온갖 이데올로기의 위장을 벗겨 내며 원초적 인간의 삶을 되찾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마르크스의 이론에서는 일차적으로 드러나는 사실을 다른 차원으로 돌려 생각함으로써 보다 더 깊이 알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 매료되었다.


   ○야콥슨과의 만남

  
   뉴욕 망명시절에 알게 된 구조주의 언어학자 야콥슨[각주:1]을 사귀면서 레비-스트로스는 자신이 추구하던 학문적 방향이 바로 구조주의라는 것을 깨달았다. 두 사람이 전파시켜 나간 구조주의의 파장은 현대사상의 패러다임에서 가장 큰 사건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것이다.

뉴욕에서 야콥슨과 만나 지적 교류를 나누는 동안 레비-스트로스는 야콥슨이 언어에 대해서 말하는 구조적 원칙들이 결혼규칙을 비롯한 친족체계, 나아가 사회의 삶 전반에 대해 자신이 그 때까지 어렴풋이 느끼던 것과 맞먹는다고 믿었다. 자신이 추구하는 사유의 방향이 바로 구조언어학의 원리와 상통한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쏘쉬르의 유산

 
   레비-스트로스가 야콥슨에게서 받은 영향은 사실 따지고 보면 쏘쉬르[각주:2]의 사상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구조주의의 뿌리를 찾자면 그것은 쏘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일반언어학 강의』에는 기존의 언어연구 방법과 매우 다른 언어이론이 들어 있는데, 그 내용의 새로움은 아주 획기적인 것이어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켜 쏘쉬르 이론에 담긴 인식론과 방법론을 묶어서 ‘구조주의’라고 부르게 되었다.

『일반언어학 강의』에 흐르는 구조주의 사상은 그 때까지 주류를 지키던 역사주의 논리에 비판적이었다. 특히 ‘비교문법’[각주:3]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역사주의 방법론에 대해 강력한 반론을 담고 있다. 비교문법은 뿌리가 비슷한 언어들의 옛 모습을 추적하여 서로 얼마나 가깝고 어떻게 갈라지게 되었는가의 문제 등을 다뤘다. 이러한 비교문법의 배경에는 당시 19세기를 풍미하던 역사주의 사상의 저변이 있었다. 헤겔의 변증법 등의 영향으로 역사는 일정한 단계를 밟아 발전한다든가, 역사의 주체는 사람이라든가, 어떤 대상의 상태를 규정하는 것은 그것의 과거, 즉 역사라든가 하는 사고가 널리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쏘쉬르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어떤 대상을 결정짓는 요인은 그것의 개별적 과거사보다는 주어진 시점에서 그것을 둘러싼 다른 대상들과의 관계라는 것이었다. 어떤 대상을 인식할 때는 그것 하나만 따로 놓고 들여다 볼 것이 아니라 그것과 관련되는 다른 것들과 함께 놓고 상관관계를 통해 살펴봄으로써 더 본질적인 진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언어의 구성요소들은 개별적으로 고립되면 큰 의미가 없고 다른 것들과 함께 어울릴 때 비로소 가치를 지닌다.

언어체계를 지배하는 원리는 하나하나의 언어요소에 뿌리를 두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있는 것도 아니며, 언어의 변화는 꼭 발전이니 퇴보니 하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도 없다는 인식이 쏘쉬르의 이론에 스며있다. 야콥슨을 거쳐 소쉬르와 접하게 된 레비-스트로스는 그의 이론과 사상을 적극적으로 인용하고 응용하며 깊은 고리를 맺어 갔다.





   2. 구조와 구조주의


   구조주의에서 “구조(structure)”는 관계의 체계이며, 통시적(diachronic)이기보다는 공시적(synchronic) 특성을 지닌다.

‘구조’개념을 모든 인식의 중심에 두는 것이 바로 구조주의이다. 어떤 대상을 고립시켜 인식하지 않고 그것과 관련되는 다른 요소들과의 관계를 통해 총체적으로 인식하려는 것이다. 이는 전통적 사유방식과 크게 다른 것이다.

어떤 문제를 다룰 때 전통적으로는 주어진 문제요소를 개별적으로 취급하는 것이 일반적 경향이었다. 문제의 요소에 초점을 맞추어 경험적으로 관찰된 자료를 중심으로 귀납하거나 이성적으로 추리된 내용을 중심으로 연역하는 것을 지극히 당연한 일로 여겼다.

연구대상에 대한 착상이나 판단과 추론 등은 전적으로 분석주체의 사유작용에 따르는 것이었다. 단독적으로 존재하는 분석대상들이 각각 분석주체와 독대(獨對)하며, 분석의 모든 가능성과 책임은 전적으로 분석주체인 개개의 인간에 귀속했다.

이런 관행이 오랫동안 이어지면서 나름대로 기여한 바도 없지 않지만 단선적인 논증을 지루하게 반복함으로써 답보상태에 빠지는 한계를 노정했다. 또한 분석주체인 사람의 과학적 책임과 주권에 대한 신뢰의 한계도 노출되었다. 그리하여 새로운 사고법을 추구한 것이 바로 구조주의다. 언어기호를 비롯한 모든 존재들의 세계에서 보다 더 복잡한 현실을 발견한 것이다. 모든 존재는 그 자체로서 또는 개별적 근거에서 정체성과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들과의 복잡한 관계를 바탕으로 담보된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어떤 존재의 인식에는 언제나 구조가 선행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체에 앞서 구조가 먼저 존재하는 것이다.

구조주의는 근대의 역사주의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전통적으로 역사주의는 헤겔식의 관념적 변증법에 따라 역사는 일정한 목적을 향해 발전한다는 인식을 깔고 있었으며, 언어과학에서는 유기체론자들과 함께 형성된 비교문법의 흐름이 이른바 ‘소장문법학파’로 이어지면서 일정한 진화법칙에 따라 맺어진 친연관계를 바탕으로 언어계통을 추적하여 옛 언어를 재구(再構)해 내려는 방법으로 나타났다. 구조주의는 이러한 역사의 규칙성을 의심하는 반면 구조적 변수들의 작용, 갈등 등에 따라 예측불허로 변동할지 모른다는 역사의 불확실성에 대한 우려를 깔고 있다. 결국 비과학적 우연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목적론적으로 통시적 시간 축에서 역사를 추적하기보다는 어떤 대상이든 공시적 구조를 먼저 밝히는 것이 급선무라고 보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역사발전의 합법칙성에 불신의 뿌리를 둔 구조주의는 ‘비교문법’이라는 역사주의적 언어연구 관행에 직면하여 구조적 문제가 고려되지 않은 개별적 사실들의 역사는 주어진 대상의 본질적 문제를 밝혀줄 수 없다고 비판했다.

그렇게 기존 사고의 극복을 시도하는 구조주의는 대상을 단선적으로 파편화하거나 고립시키지 않고 같은 영역에 속하는 모든 요소들을 하나의 전체로 보고 그들이 어떻게 서로 어울려 총체적 체계를 이루면서 모든 단위체의 가치를 산출하느냐에 관심을 집중한다. 개체는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하고 단지 구조의 구성요소로서만 가치를 지닌다.

단자론적 개별성, 비교론적 역사성, 인본적 주관성, 화용적 지시성 등을 뛰어넘어 대상세계의 독립된 총체적 체계에서 모든 존재가치를 규명하려는 구조주의는 이제 구조를 자율적으로 독립시켜 모든 관심의 초점을 그 안으로 집중한다. 구조적 요소들은 그들만의 관계로 맺어진 하나의 자율적 전체를 이루며 자신들의 모든 문제들을 스스로 끌어안고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고 또 그럴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구조주의 방법론은 언어학의 ‘음운론’, ‘형태론’, ‘통사론’, ‘의미론’, ‘기호학’ 등에서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 언어학에서 말하는 ‘구조’의 개념은 매우 과학적 인상을 주었다. 인접 분야의 학자들이 구조언어학의 교훈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나름대로 수용해 보려고 애썼다. 전체와 부분 그리고 부분과 부분들 사이의 관계를 엄밀하게 체계화하고 수량화까지 할 수 있는 ‘구조’개념은 기존 사상의 권태로운 흐름에서 벗어날 좋은 소재를 마련하였다. 그래서 앞 다퉈 구조 개념을 차용하여 각자의 영역 특성에 맞게 적용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구조주의는 언어학의 좁은 울타리를 헐고 범학문적 지평으로 발길을 넓혀 갔다.

구조주의를 언어학 밖으로 확산시키는데 가장 앞장섰던 레비-스트로스는 언어이론 가운데서도 특히 음운론의 방법론을 자기 이론의 전범으로 삼았다. 구조언어학에서 큰 성과를 올린 음운이론을 인류학에 거의 그대로 연장해서 적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것을 ‘신화’, ‘결혼제도’, ‘친족관계’, ‘토템’, ‘예술’ 등의 문화 분석에 응용하여 일종의 인류학적 음운론을 설계하였다. 그리하여 표면적으로 경험하는 구체적 사회현상에서 껍질을 이루며 달라붙어 착시(錯視)효과를 일으키는 영상들을 뛰어넘어 개념적으로 추상화하는 일을 강조한다. 진정한 실재는 겉에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그것에 이르기 위해서는 실존과 절연하고 객관적 종합을 통해 추상적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참고 문헌>

주경복,『레비스트로스』, 건국대학교출판부, 1996.

고봉만,「레비스트로스의 미학에 관한 연구」, 충북대학교 인문학연구소, 2005.

박정호 외,『현대 철학의 흐름』, 8장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동녘,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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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Roman Jakobson, 1896.10.11~1982. 러시아 출신의 미국 언어학자로 프라하학파의 창시자가 되었다. [본문으로]
  2. Ferdinand de Saussure, 1857.11.26~ 1913.2.22. 스위스의 언어학자로 근대 구조주의 언어학의 시조로 불린다. [본문으로]
  3. 친족 관계에 있는 언어 상호 간의 문법적 사실을 비교 연구 하여 공통 조어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문법. [본문으로]
Posted by soul